이공주 선진 사가, 당시 가장 좋은 집으로 응접실 갖춰
도산 안창호 방문… 일제, 북일주재소 설치해 감시

청하원은 소태산 대종사에게 ‘법낭’이라고 불린 구타원 이공주 종사의 사가로 지어졌다.
청하원은 소태산 대종사에게 ‘법낭’이라고 불린 구타원 이공주 종사의 사가로 지어졌다.

[원불교신문=이은선 기자] 중앙총부 정문 입구 오른편에 자리한 청하원은 소태산 대종사에게 ‘법낭(法囊·법주머니)’이란 호칭을 받은 구타원 이공주 종사의 사가로 지어졌다. 원불교 초창기를 이끌어 온 선진의 사가였다는 점 외에도 소태산 대종사가 독립운동가를 만난 곳, 일경의 주재소가 설치됐던 곳 등 여러 역사적인 상징을 지니고 있다.

청하(淸河)는 구타원 종사의 아호이다. 구타원 종사는 출가한 후 소태산 대종사의 많은 법설을 수필해 『회보』에 발표, 회원들에게 수행의 길잡이가 돼주었으며, 『대종경』 편찬에도 귀중한 자료를 많이 제공했다.

원기17년(1932) 9월 전무출신을 하기 위해 중앙총부에 온 구타원 종사는 본원실 동쪽 방(동아실)을 사용하다가 원기19년(1934) 8월 20일, 본인의 사가로 6칸 겹집의 안채(건평 86.94㎡)와 문간채 3칸 건축을 완성한다. 청하원은 일식주택의 영향을 받은 개량한옥의 모습을 띤다. 일식 목구조가 주된 구조이며 부분적으로 전통적 기법을 수용했다.

이곳은 당시 중앙총부 구내에서는 시설이 가장 잘 된 집이었다. 방을 밝히기 위해 방과 마루 사이에 낸 두 쪽의 미닫이인 영창문(映窓門)이 설치되는 등 당시 신식 건물로서의 면모를 갖췄고, 안채 가운데 응접실이 있었다. 특히 청하원 응접실은 중앙총부 응접실로도 사용됐다. 원기20년(1935) 여름, 도산 안창호가 전국 각지를 순회하던 중 중앙총부를 방문해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장소도 이곳 청하원 응접실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감옥생활 등 민족을 위해 고생스런 삶을 살고 있는 안창호를 위로했다. 이에 안창호는 “선생께서는 일의 판국이 넓고 방편이 능란하시어,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면서도,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니 역량이 참으로 장하옵니다”라고 했다. 
 

청하원 응접실.
청하원 응접실.

안창호가 중앙총부를 방문해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고 돌아간 뒤, 일본 경찰은 불법연구회와 소태산 대종사를 감시하기 위한 강도 높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원기21년(1936) 가을부터 일제는 이리경찰서 북일주재소를 청하원 응접실에 설치하고 형사를 파견해 불법연구회와 소태산 대종사를 감시하기에 이른다.

서문성 교무(효자교당)는 “북일주재소가 있었던 청하원은 일제의 탄압을 받은 상징적인 장소다. 이러한 옛 초기교단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청하원은 또 원기48년(1963) 4월, 정기수위단회에서 수도원 발족이 인가된 후 수도원 관련 사무가 이뤄진 곳이기도 하며, 개교반백년기념사업 때 총부정문 확장공사로 인해 문간채 등이 헐렸다. 현재는 감찰원장실로 쓰이고 있다.

[2022년 3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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