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 교무
김도영 교무

[원불교신문=김도영 교무] 총부는 늘 자랑스럽고 그리운 곳이다. 왜 그럴까. 원불교 교도들의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향타원 박은국 종사는 총부에 대한 그리움을 ‘우리 님 대자대비 그 목소리 / 솔바람 달빛 속에 메아리쳐 오네 / 임께서 거니시던 마음의 고향 / 아침저녁 시방 삼세 울려 퍼지는 / 종소리 목탁소리 염불소리 노래소리 / 만 중생 업장 녹는 마음의 고향’(성가 159장)이라 표현했다.

총부를 순례하고 나면 마음의 평온과 맑혀진 머리를 체험할 수 있다. ‘청량산을 바라보면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는 퇴계의 말처럼 총부는 늘 우리에게 동경의 의지처이다.

필자는 윤산 김윤중 종사의 인도로 1975년 2월 25일, 20세에 총부에 와서 명받고 이리보화당에서 간사근무를 시작했다. 눈보라 치던 날 자전거로 10리길 총부 어른들의 약을 배달할 때는 짜증도 났지만, 꽁꽁 언 손을 잡아주시면서 자식처럼 반겨주었던 인정과 자비로운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총부는 늘 그리움이었다.

당시 총부에서는 기관대항 배구대회가 가장 인기 있는 행사였다. 기관대항 배구대회는 당시 각 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에게 엔돌핀(endorphin)이 되었다. 이유가 있다. 이는 ‘나도 소태산 대종사님 성혼이 깃든 마음의 고향, 총부에 간다’는 그리움 때문이다. 

 

총부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교단이 커지고

세월의 탓도 있으리라.

필자가 원로원 근무 때 민산 이중정 종사에게 들은 6.25 당시 총부 이야기가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그해 7월 19일 날, 인민군이 황등 쪽으로 해서 총부로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정산종사께서 대각전 서쪽 방에 계시고 진지(식사)는 여학원생들이 머물던 정미소에서 들고 하셨다. 8월 초쯤 몇몇이 정산종사께 ‘저들이 언제쯤 물러갈까요?’ 하고 말씀드렸는데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 사람들아 두 달도 못 간다’ 하셨는데 9.28 수복이 되었다. 하루는 오전 10시쯤 인민군들이 사열 종대로 해서 쭉 들어오는데 미군 비행기가 저공 비행해서 왔다. 기마병들은 보건대학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폭격을 하지 못하고 갔다. 총부 건물이 목조건물이니 폭탄 몇 개만 떨어뜨리면  모두 다 없애버릴 것인데도 폭격을 하지 못했다.

정산종사께서는 ‘일심으로 기도를 올리면 선신(善神)들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하셨다. 그리고 ‘여래의 위대한 회상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침범을 못 하는 것’이라 하셨다. 총부에서 직경 1㎞ 내에서는 사람 하나 죽지 않았다. 크신 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부 안에 육도사생이 다 있다. 그들 모두 제도를 받는다. 서대원 선생의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총부 안으로 지나가는 메추리 새도 제도를 받는다’ 하였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총부는 참으로 신비롭고 경이로운 땅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총부는 지방 교무들에게 의지처이며 안식처였다. 억울함과 고난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응산 이완철 종사는 누구와도 무간한 할아버지였다. 구내 이곳저곳 찾아가 ‘어떻게 사는가’ 하고 일일이 살피며 세세 곡절 진정을 통해 주었다. 또한, 교화 일선에서 애쓰다 총부를 찾아오는 후진들은 으레 응산종사를 찾아가 무슨 일이든 다 털어놓고 하소연했고, 나올 때면 환한 얼굴에 안심과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어려운 교당과 건강이 좋지 않은 교무에게는 편지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응산종사를 ‘교단의 어버이’라고 불렀다.

총부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교단이 커지고 세월의 탓도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종교적 절차 등 껍데기만 중시하는 경향이다. 인정과 자비로운 빛의 알맹이는 없어진지 오래다. 일선 교무들의 의지처가 없어졌다. 의지처 없이 ‘고해의 바다’를 건너기엔 너무도 막막하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할까. 총부가 점점 박제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삼동인터내셔널

[2022년 4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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