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 교무
김도영 교무

[원불교신문=김도영 교무] 일시(一時)에 범산 이공전 종사께서 꾸중하셨다. 

“이 몽둥이 같은 놈아!”

“종사님, 몽둥이가 뭐예요. 윤산님(김윤중)은 늘 ‘나사 빠진 놈’이라 하시더만요.”

필자가 원로원에서 범산 종사님 숙소를 청소할 때 내 생각대로 하다가 들었던 꾸중이다.

범산 종사의 구술에 의하면 소태산 대종사께서 제자들에게 꾸중하실 때 쓰신 표현 중에 하나가 ‘몽둥이 같은 놈’이란다. ‘몽둥이’에 대해서 문산 김정용 종사는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의미로 사용하신 것이라 하였다. 또한 『논어』 공야에 공자가 낮잠을 자는 재여(宰予)에게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으며,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질을 할 수 없다”고 꾸짖는 말이 있는데, 이와 같은 의미라 하였다.

“장차 이 회상의 주인 될 놈이 그래가지고 되겠느냐?” 

이 꾸중에 대한 일화다. 문산 종사는 신룡벌 원광의 태동인 ‘유일학림(唯一學林)’ 1기 학원생일 때 수업 중 쉬는 시간에 윤산종사 등 동료들과 함께 밖에 나와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떨어진 탱자를 주워서 구슬치기를 했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께서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구슬치기를 한 학원생들에게 내리신 말씀이다. 이는 “너희들이 이런 정신으로 길러져서 어떻게 이 회상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느냐?”는 염려와 깨우침이 들어 있다.
 

수많은 경계 속에서 
하나로 살기란 쉽지 않다.
특히 우리 회상에서도 그렇다.

오늘날,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초창기 전무출신을 서원한 사람들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지만 지금은 옛말이 된 것 같아 어쩐지 씁쓸하다.

이러한 생각으로 필자도 출가 후 지난 세월을 돌아보았다. 부끄러운 속내를 털어놓자면 자주 길을 잃고 출가와 속세의 경계선 언저리를 헤매며 산 것 같다. 육신은 출가의 몸인데, 마음은 욕망 덩어리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지면에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세간의 경계선 어디쯤이리라.

불가의 무문관(無門關) 제35칙에 괴이한 화두가 있다. 어느 때 법연(法演, 1024~1104, 송나라 승려)이 제자에게 “천녀이혼(倩女離魂)인데 어느 쪽이 진짜인고?”라고 물었다. 이 화두는 당나라 시대의 전기(傳記) 소설에 나와 있는 한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한 남녀 ‘천녀와 왕주’가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의 욕심으로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려다 사달이 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질 수 없게 되자, 딸은 병에 들어 급기야 앓아누웠다. 

시름시름 앓던 딸은 이내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야반도주한다. 멀리 떠난 이들은 행복하게 살다 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게 되는데, 고향에 돌아온 왕주는 기절초풍할 얘기를 듣게 된다. 

그들이 떠나서 행복하게 사는 동안, 천녀는 규방에 병든 채 내내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동안 나와 함께 산 여인은 누구였단 말인가. 왕주는 사실 확인을 위해 천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러자 방안에 누워있던 여인이 벌떡 일어나 천녀와 하나로 합일되었다는 귀신같은 이야기다.

법연 스님의 물음은 여기서 비롯된다. 자, 그렇다면 어느 것이 진짜냐? 규방에 누워있던 여인이 천녀냐? 아니면 도망가 살던 여인이 천녀냐? 몸과 혼이 따로 떨어져 있었다면, 어느 쪽이 진짜냐는 물음이다. 

참 난해하다. 사실 정답이란 없다. 다만 이 질문이 주는 의미는 ‘하나로 살라’는 것이다. 합력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경계 속에서 하나로 살기란 쉽지 않다. 특히 우리 회상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내 지식, 내 생각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 방식대로 고집하며 살기 때문이다. 세월이 갈수록 그러한 삶을 옆에서 늘 꾸중해 주신 어른들이 그립다.

/삼동인터내셔널

[2022년 5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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