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교장 
이진희 교장 

[원불교신문=이진희 교장]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혁명은 반대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한 후 전투적으로 새 정책을 펼쳐나가지만, 개혁은 반대 세력의 저항을 그대로 안고 정책을 추진하기에 힘겨울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개혁이 지니고 있는 숙명이다. 그래서 개혁 주체는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개혁의 진행 과정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다. 우선 개혁은 잘못된 제도나 관행을 깨는 것으로 기득권 세력의 반대는 필수적 부산물이다. 설사 대중들이 개혁의 명분이나 필요성에 공감한다해도 기존의 관행에서 오는 익숙한 편리함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또 그들은 시비보다는 이해관계의 셈법으로 접근하므로 개혁 정책이 자신의 이익을 해친다고 판단되면 기를 쓰고 반대하기 마련이다. 

또한 내적 결속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형성된 조직이라면 개혁은 더욱 어렵다. 영화 <이끼>나 <고지전>에서처럼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 ‘그들만의 섬’으로 형성된 조직은 더욱 그렇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우리가 남이가’ 등 구성원 간의 이익을 도모하고 급기야 서로의 잘못까지도 슬며시 덮어주는 인정의 공동체가 돼버린 조직은 모럴 해저드(도덕적 불감증)의 늪에 빠진 것이다. 이런 조직은 자정능력이 떨어진다. 그들만의 소통을 통해 편향된 시각을 지닌 채 집단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에 개혁의 대의를 그르칠 확률이 대단히 높다. 

또한 개혁의 성과가 드러나지 않을 때 조직은 만성적 피로감에 쌓일 수 있다. 개혁 초기에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개혁 성과에 대한 아쉬움, 지지부진한 목표 달성은 흐지부지 개혁으로 치부되고 급기야 개혁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다는 등, 구관이 명관이라는 등의 말이 오가게 된다. 그 지경에 이르면 개혁 주체의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다.

 

변화를 주도할 힘을 가졌다면 
스스로 개혁의 대상도 
된다는 것을 보여야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개혁 주체가 스스로를 개혁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함을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개혁은 성격상 혁신 드라이브를 걸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권력은 집중된다. 그런데 이때 개혁 주체가 자신의 논리로만 진리와 정의를 독점하고 상대만을 개혁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칼자루를 휘두르게 되면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는 꼴이 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정권 교체기에 보여준 대표적 문제가 아니던가? 변화를 주도할 힘을 가졌다면 스스로 개혁의 대상도 된다는 것을 보여야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개혁 주체는 솔선수범과 분골쇄신의 각오로 자신부터 단속하고 성찰함으로써 개혁의 정당성을 담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혁은 과거를 경험삼아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조직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 조직 내외의 환경은 부단히 변화하고 있고, 조직 역시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과거의 성패를 거울삼고 다가올 미래를 지향하면서 현재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고속도로나 지하철을 건설했던 초창기를 떠올려보자. “조상들은 오솔길, 꼬부랑길로도 여태 잘 살아왔다. 이 무슨 해괴한 발상이냐? 우리가 두더지냐? 왜 땅을 파서 지하철을 만드느냐?”라고 내질렀던 많은 반대 목소리들. 그것에 밀려 개발 정책이 좌초되었다면 그래서 고속도로도 지하철도 건설되지 못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도로 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변화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발전의 거부를 넘어 퇴보하겠다는 굳은 다짐과 같다. 

그러니 미래를 향해 깨어있는 자세로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갖고, 변화는 진행형이라고 인식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정부나 원불교 교단이나 변화의 시점에 서 있다. ‘여태 이러고도 우리는 그럭 저럭 살아왔는데... 뭐?’ 이런 문제의식 없는 안이한 생각,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개선과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찬란한 우리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한겨레중고등학교

[2022년 4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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