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 교무
김도영 교무

[원불교신문=김도영 교무] 노구(老嫗)의 가수가 있다. 장사익(張思翼) 선생이다. 1949년도 충남 홍성군 광천에서 태어났으니 올해 74세다. 선생이 부른 곡 중에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들어 보았다. 이 노래엔 우리의 삶에서 비껴갈 수 없는 시비이해(是非利害)의 만남이 있었다. 좋아도 싫어도 살아가면서 인생에 ‘만남’은 필수 코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만남을 통해 무언가 얻기를 바라며 산다. 그래서 내가 채워지고, 강해지고, 풍족해지기를 꿈꾼다. 그래야 생산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장사익 선생의 이 노래는 거꾸로다. 

이 노래는 노래가 아니었다. 어설픈 수행자로 살아온 필자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내려치는 그 어떤 물음이었다. ‘너는 살아오는 동안 수 없는 만남을 통해서 무엇을 버렸느냐?’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 /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 /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 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 한강되어 흐르네 /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 설레이는 두물머리 깊은 물에서 /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필자가 원로원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살 때 일이다. 숙소가 3별관 현관 옆방이었는데 한적한 저녁이 되면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하루 이틀 연속이다. 그 소리가 취침을 방해한 지 4일째 되는 날, 맘먹고 소리를 찾아 나섰다. 그 괴이한 소리는 지하실에서 났다. 장마로 인해 지하실에 물이 가득 고였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그 속에 들어가 물 위에서 살아보려고 4일간 헤엄치면서 내는 고통의 소리였던 것이다. 수중모터로 물을 빼내고 강아지를 안고 나와 현관 앞에 놓으니 강아지는 일어서지 못하고 그냥 거꾸러졌다. 그리고 온몸의 털가죽이 순식간에 쫙 벗겨져 버렸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광경을 염산 이수오 종사가 보셨다. 
 

남한강이 남을 버리고, 
북한강이 북을 버릴 때 
우리는 ‘한강’이 된다.
하나의 강, 큰 강이 된다.

“성산, 그 강아지를 나에게 주소. 내가 보살펴서 보내겠네” 

그 후 염산 종사는 그 강아지를 숙소로 데리고 갔고, 강아지에 대한 보살핌은 부모 그 이상이었다. 혹여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필자가 챙기려 하면 “놔두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하면서 손수 챙기시고, 시내에서 두유와 영양제 등을 사다가 먹이시고, 보듬고 ‘일원상 서원문’을 외워주시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염산 종사는 자신을 버림으로 그 강아지와 하나가 되었다. 

사람과 동물의 관계도 그렇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마음 주머니에 지퍼를 잠그고 산다. 자신이 경험하고 축적한 시비를 움켜쥐고 버리지 못한다. 혹여 나를 버리면 자신의 앎과 옳음이 아닌 것 같고,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 쉽사리 자신을 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래는 남한강이 남을 버리고, 북한강이 북을 버릴 때 우리는 ‘한강’이 된다고 한다. 하나의 강, 큰 강이 된다고 한다. 얻음이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말이다. 

사색을 해보자. 자신을 버릴 때 왜 하나가 될까? 왜 더 큰 강이 될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나를 버릴 때 상대방 속으로 녹아들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나를 버릴 때 비로소 상대방이 내 속으로 녹아들게 된다. 그래서 하나의 큰 강이 된다. 

종교도 마찬가지 아닐까? 원불교가 원불교를 버리고, 기독교가 기독교를 버릴 때 하나가 된다. 그걸 알면 교화도 두렵지 않다. 원불교가 원불교를 버린다고 소태산 대종사의 법이 사라지지 않으니까. 

상산 박장식 종사의 최후 법문이 떠오른다. “둘이면 안 됩니다. 하나여야 합니다. 합력해야 합니다.”

/삼동인터내셔널

[2022년 6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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