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대승불교에서는 신(信), 곧 믿음을 강조한다. 『금강경』 6장에서 수보리가 후대의 중생이 ‘실신(實信)’ 혹은 ‘참되다는 생각’을 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은 믿음이 깨달음을 얻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확고한 사람은 흔들림 없이 공부길을 밟아나갈 수 있다. 이렇게 중요한 신심은 어떻게 낼 수 있을까?

『금강경』에는 여래가 열반한 뒤 후오백세에 ‘계문을 지키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금강경』의 구절을 듣고 참되다는 마음, 즉 신심을 낸다고 했다. 이 사람은 한두 부처님에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무량한 부처님의 처소에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금강경』의 구절을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낸다고 전한다.

이처럼 불법에 대한 참다운 믿음을 내려면 계문을 지키고 복을 짓는 과정이 필요하다. 계문을 지킨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다스려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이고, 복을 짓는 것은 밖으로 보시하고 불공하여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지계수복(持戒修福)의 과정이 반야 수행의 문에 들어가는 토대가 된다.

계문을 지켜서 악행을 하지 않아야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할 수 있다. 이 편안한 마음을 바탕으로 선정을 얻고, 이 선정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또 보시와 불공으로 복을 지어야 공부를 도와주는 선연을 만나고 지혜를 열어주는 스승을 모실 수 있다. 그래서 자량(資糧)이라는 말이 있다. 자량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는 데 바탕이 되는 선근·공덕을 말한다. 계문을 지키고 복을 짓는 것은 자량을 준비하는 것이고, 자량이 부족한 공부는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

불교는 지혜를 중시한다. 지혜를 얻어 해탈과 열반을 얻는 것이 불교 공부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계율을 지키고 복을 짓는 것은 불법을 배우고 도를 깨우치기 위한 입문이자 토대일 뿐이고, 불도를 닦는 목적은 반야의 지혜를 얻는 데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계문을 지키고 복을 지어야 한다. 다만 반야를 바탕으로, 보다 잘 하자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려는 것은 성품의 본래 자리를 알아, 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나니, 만일 견성만 하고 성불하는 데에 공을 들이지 아니한다면 이는 보기 좋은 납도끼와 같아서 별 소용이 없나니라”(『대종경』 성리품 7장)고 했다. 심오한 반야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은 얻은 지혜를 잘 사용하기 위함이다. 지혜를 얻는 것이 견성이고, 지혜를 활용해 성불하는 것이다. 공부의 시작은 지계수복으로 시작한다. 공부의 끝도 역시 지계수복일 것이다. 계문을 지키고 복을 짓는 것에 믿음과 수행과 성불이 있을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5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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