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 교무
김도영 교무

[원불교신문=김도영 교무]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말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사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뺨 맞은 것도 억울한데 다른 쪽 뺨을 내밀라니. 겉옷을 빼앗겼는데 속옷까지 내주라니.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법조인 등 수 많은 지도층의 부류들과 노동계 그리고 신앙, 수행의 집단인 종교계까지 자기 밥그릇에는 험한 이빨을 드러내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 예수의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런데 예수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소태산 대종사도 그랬다. 제자들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앞에 버려진 간척지를 옥토로 만들려고 방조제 공사를 하는데 주변에서 자기의 권세와 금력을 믿고 그걸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있어 걱정하는 제자들을 보고 말했다.

“우리는 할 일만 하세. 못 쓰던 땅을 옥답으로 만든다면 설사 빼앗겼다 해도 땀 흘린 공이 어디 가겠는가? 길룡리 사람들이 소작만 얻더라도, 쌀밥 구경을 하게 만든 것도 공덕 아닌가?”

분통 터지는 일이다. 죽도록 일해 얻은 땅을 빼앗기는데 공덕 타령이라니 당시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원수를 수천 번 
사랑한다 해도 
내 마음의 선이 무너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원수는 여전히 원수일 뿐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간단하다. 나에게 좋으면 선이고, 나에게 싫으면 악이다. 내게 잘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내게 못 하면 나쁜 사람이다. 우리가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항상 ‘나’다. ‘나의 이익’, ‘나의 생각’, ‘나의 잣대’가 기준이다. 

2005년 개봉된 ‘웰컴 투 동막골’이란 영화가 있었다.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함백산 절벽들 속에 자리 잡은 마을엔 선악이 없었다. 인민군이 들어와 재밌게 놀던 아이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손 들어’ 해도 아이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왼손이요’ ‘오른손이요’ 하는 그 천진한 아이들에게는 선도 없었고 악도 없었다. 동막골은 그런 곳이었다. 

한마디로 ‘선 긋기’다. 내 마음의 선 긋기. 그로 인해 이쪽과 저쪽, 좋고 나쁨, 선과 악이 생겨난다. 그렇게 그은 선이 수십 개, 수백 개가 뭉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다. 철학적인 용어로 ‘에고(ego)’라고 부른다. 그렇게 그어 놓은 숱한 선들이 뭉친 것이 에고다. 그 선들이 에고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선을 지우려면 말이다. 그 선을 지워서 선악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야 우리가 평화로운 동막골을 만날 테니까.

성인들은 선이 없다. 그 이유가 있다. 모든 게 하나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을 하나로 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왼뺨도 주고 오른뺨도 줄 수 있고, 내가 일궈서 만든 땅도 내줄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다. 그래서 분별심이 가슴 속에 가득 채워져 있다. 분별심은 선 긋기의 명수이다. 선은 그을수록 두꺼워지고 깊어진다. 그래서 나중엔 철천지원수가 된다.

오른뺨을 맞고서 왼뺨을 내미는 것, 내 것을 남에게 내주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내 마음에 그어 놓은 ‘잣대의 선’을 지우는 게 목적이다. 왼뺨을 수십 번, 수백 번 다시 내밀어도 내 마음의 선이 지워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죄 없는 뺨만 아플 뿐이다.

원수를 수천 번 사랑한다 해도 내 마음의 선이 무너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원수는 여전히 원수일 뿐이다. 내 마음에 그은 선이 하나둘 지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닮게 되고 소태산 대종사를 닮게 된다.

/삼동인터내셔널

[2022년 8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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