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금강경>의 가르침은 상을 없애고, 상에 주한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상을 없앤다는 것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이 본래 부처라면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단계가 필요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상을 없애는 것에 그친다면 성문사과의 계위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을 없애고 동시에 상에 주한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면서도, 그 사이에는 ‘마음을 내는 수준’에 차이가 있다.

성문사과의 첫 단계는 ‘수다원’이다. <금강경>에서는 “수다원은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 “수다원은 흐름에 들어감(入流)을 말하지만,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간 바가 없어서 이름을 수다원이라고 합니다”라고 한다. 

수다원은 성스러운 흐름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입류(入流) 혹은 예류(豫流)라고 한다. 혜능은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육진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에서 역류(逆流)라고도 했다. 생사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이 무엇일까? 과거에는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것을 중심으로 풀이했다. 이런 풀이는 자칫 이 세상을 떠난 이상향, 초월적인 세상으로의 탈출을 상상하게 된다. 이러한 풀이는 부처님의 본의와 거리가 있다. 

정산종사는 <금강경해>에서 “수다원은 그 공부가 성인의 류(類)에 든다는 이름이니… (중략) …그 공부가 성인의 류(類)에 들었으되 들어간 바가 없고 빛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몸의 접촉과 뜻의 아는 바가 있으되 주착함이 없는 자를 참으로 성인의 류(類)에 들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단순하게 말해 ‘주착함이 없는 자’가 성인의 경계에 들어선 사람이라고 본 것이다.

범부는 육근이 경계를 대할 때 욕심에 휘둘린다. 내 마음속에 욕심의 종자가 있기에 육근이 외부의 여섯 가지 경계를 대하면 불같은 욕심이 일어난다. 이 욕심을 따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국 자신과 주위에 해독을 미친다. 이러한 행동이 생사의 흐름이고, 범부가 윤회하게 되는 과정이다.

성인은 나(我)라는 상에 잡히지 않는 사람이다. 나라는 것이 없으니 나만을 위한 욕심에 휘둘리지 않는다. 아마 성인도 욕심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욕심에 잡히지 않기에 성인일 것이다. 욕심을 잘 승화시켜 자신과 주변에 이익이 되도록 마음을 낸다. 이것이 주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는 성인의 모습이고, 육진에 물들지 않는 역류다.

우리의 마음에 욕심과 사상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리고 바른 마음으로 돌리는 공부를 하고 있다면, 자신의 주권을 지키려 노력하며 욕심과 사상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성자로 가는 흐름에 들어선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8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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