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無爭三昧)를 얻어 사람들 가운데 제일이라. 곧 으뜸으로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금강경> 9장 중)

아라한의 약칭은 나한(羅漢)이다. 아라한은 본래 부처를 가리키는 명호다. 불교 초기에는 아라한이 부처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고, 그 차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또한 제자들(聲聞乘)이 도달하는 최고의 계위, 이상적인 모습으로 칭하는 용어였다. 이후 대승불교에서 부처와 아라한을 구별하여, 아라한은 부처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소승의 성자로 격하시키기도 했다. 

아라한은 살적(殺賊), 불생(不生), 응공(應供)의 뜻이 있다. 번뇌라는 적을 물리쳤기에 살적이고, 영원히 열반에 들어가 생사를 벗어났기에 불생이다. 이에 세상의 존경과 공양을 받을만한 성자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또한 더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이라고 하여, 아직 배우고 닦을 것이 남은 유학(有學)과 구분되어 불린다. 

<금강경>에 나타난 아라한의 특징은 무쟁(無諍)이다. 구마라집은 ‘무쟁삼매(無諍三昧)’ 혹은 ‘아난나행을 즐기는 자(樂阿蘭那行)’라는 표현을 하였고, 현장은 ‘무쟁주(無諍住)’라고 표현했다. 이는 산스끄리뜨어 ‘araṅāvihārin’의 번역인데, 구마라집은 ‘머물다’는 뜻의 ‘vihārin’을 삼매(三昧, samādhi)로 옮겨 ‘무쟁삼매’라고 하였고, 현장은 주(住)로 옮겨 ‘무쟁주’라 하였다. ‘아난나’는 다툼이 없다는 뜻을 가진 ‘araṅā’의 음역이다.

‘무쟁주’를 중심으로 풀이해 보자. 무쟁주는 다툼이 없는 조용한 처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처소와 상관없이 다툼이 없는 상태에 머문다는 의미일 것이다. 경계와 상관없이 다툼이 없기 위해서는 상(相)을 벗어나는 공부를 완전히 하여 마음의 그림자가 남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의 종교·너의 종교, 우리나라·너의 나라, 내 민족·네 민족 등의 장벽이 없고, 부처와 중생, 보리와 번뇌의 구분도 없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구분을 통해서 정의와 불의를 구분한다. 많은 종교가에서도 선악(善惡)을 구별하고, 이상적인 천국과 현실의 세계를 구분하면서 사람들을 제도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라한은 이런 상도 넘어서서 성속(聖俗)의 이원론(二元論)적 사고방식을 넘어선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벗어났기에 우주 만유가 둘 아닌 심경으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일체생령을 제도한다. 그래서 다툼이 있는 경계를 당해도 그 다툼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능력이 있다. 대자대비로 일체생령을 제도하되 만능(萬能)을 겸비하였고, 대의에 어긋남이 없는 방편으로 모든 생령을 제도한다. 스스로 다툼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체생령을 다툼 없는 세상으로 인도해 함께 즐기는 경지가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아라한 아닐까 한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9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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