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훈 교무
길도훈 교무

[원불교신문=길도훈 교무] 한때 선정에 들어도 진리인식이 깊지 못하면 별 의미가 없다. 선 수행으로 선정에 이르러 솟는 지혜는 진리인식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진리인식을 위한 경전 공부는 일반적인 사고 체계로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법을 문자로만 알면 문자의 의미와 씨름하느라 하세월일 수 있다. 문자가 곧 법이 될 수는 없기에 문자로는 관념의 범주를 넘어서기 어렵다. 문자는 법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니 말이다. 더 구체화시켜 설명한다 해도 인형으로 알려 주는 정도다. 법이 곧 손가락이고 인형인 줄로 알고 손가락과 인형을 이리저리 헤집어 살핀들, 이로써 법을 알기는 요원하다.

아무리 정법일지라도 법이 법의 뿌리인 진리로 헤쳐 들어갔다 나와야 법이 법답다. 나아가 진리를 온전하게 꿀꺽 삼켜야 의식의 전반이 진리와 법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 비로소 진리와 법이 내 것으로 된다. 이 정도는 돼야 재색명리나 권력이 손에 쥐어져도 자신에게 담긴 진리와 법이 오염되지 않는다. 

법을 부숴 진리의 본 모습을 보는 공부를 속 깊은 공부라고 한다. 공부법으로는 의두와 성리가 있다. 이를 통칭해 성리라고도 부른다. 성리 연마는 진리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아는 것에서 우주만유로 펼쳐지는 이치와 실제에 대해 꿰뚫어 알기 위함이다. 나아가 이 앎이 가슴속으로 들어와 생각을 궁굴리지 않아도 눈에 선할 정도로 떠오른다면 진리를 제대로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성리에 깨어난 진리인식은 선정에서 지혜로 솟을 때 더욱 폭넓고 깊은 힘을 지닌다. 그만큼 실제의 삶으로 이어질 확률도 높다. 이처럼 수행자의 수행 정도의 최종은 삶의 모습으로 가늠하게 된다.

우선, 성리의 여부를 종교부터 살펴보자. 성리가 살아있지 않는 종교는 한 마디로 사도(邪道)다. 이런 종교는 날이 갈수록 본의에 깨어 있지 못하니 권력과 기복으로 치닫게 된다. 출가자 개인도 성리가 없으면 관념과 이상(理想)에 그친 고급 중생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에는 내용보다 형식을 쫓으니 말이다. 형식 쫓아 한때 잘 산 것 같아도 자리가 주어지면 수행의 본의와 보은보다 권력을 선택하고, 자리놀이에 빠져 지내게 된다. 더 나아가 대중 위에 군림하며 대중을 조종하려 들기도 한다. 더 한심한 경우는 이런 흐름에 익숙해진 대중마저 권력에 복종하니 그 권력의 고리는 좀처럼 끊어질 수 없다. 수행자의 자리와 일은 본래 성리에 깨어 운영하는 심법으로 자기 법위를 검증받는 시험대다. 이 검증이 제대로만 되어도 그곳에는 성리가 숨지 못한다.

성리가 살아있는 곳은 적적대의가 살아있고 미래에 깨어 열려있다. 오히려 세상에 앞서서 길을 제시한다. 도저히 세상의 변화와 세상의 의식보다 뒤처질 수 없다. 종교가 세상의 의식보다 뒤처져 있다는 것은 수행과 성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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