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금강경> 12장에서는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8장의 내용과 11~12장의 내용은 변주·반복되고 있다. 8장 후반부에는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일체 모든 부처와 부처의 아뇩다라샴먁삼보리의 법이 다 이 경전에서 나왔다. 수보리야 소위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고 했다. 12장에서는 “이 경전을 설하다가 사구게에 이르면 온 세계의 천인·아수라들이 모두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공양할 것이다. 하물며 이 경전 전부를 수지독송하는 사람은 (말할 필요가 있을까). …(중략)…. 이 같은 경전이 있는 곳은 곧 부처가 계신 곳이 되고 위대한 제자들이 있는 곳이 된다”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후 민간에는 탑을 부처님처럼 모시는 신앙이 퍼졌다. 12장을 통해 당시 탑신앙이 경전신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엿보인다. 집집마다 경전이 있다면 집집마다 탑(부처님)을 모신 것이 된다. 과거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은 그 자체로 보물과 같은 가치가 있었다. 그래도 탑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전을 존중하는 것은 불법의 대중화와 함께 진행되었을 것이고, 12장 내용은 신앙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그렇다고 경전을 신성하게 모시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앞서 뗏목의 비유처럼 <금강경>은 ‘경전에도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금강경>이 있는 곳’은 경전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을 잡아 <금강경>을 굴리는 자리를 말할 것이다. 원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일원상을 굴리는 자리를 말할 것이다. 곧  육근을 사용할 때 원만구족하고 지공한 원상을 사용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것 역시 단순히 머리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증득하고 몸으로 실천해서 체화되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함께 진급하는 것, 곧 ‘위타인설(爲他人說)’ 하기 위한 몸부림이 있는 곳이 바로 ‘<금강경>이 있는 곳’일 것이다.

혜능도 체득을 강조했다. “자신의 마음에서 이 경전을 외우고 자신의 마음에서 이 경전의 뜻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 능히 무착과 무상의 이치를 체득하여 자신이 있는 곳에서 늘 부처님의 행을 닦는 것이 생각 생각에 틈이 없이 이어진다면, 곧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므로 ‘이 경전이 있는 장소는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혜능, <금강경구결>)

경전을 수지독송하는 것은 그 가르침으로 우리의 삶을 운전하기 위한 것이다. 중생의 옷을 입고 있는 우리가 <금강경>을 나침반 삼아 살아가면서 어찌 흔들림이 없을까. 그 흔들림 속에서도 끊임없이 수지독송하는 몸부림이 신성한 것이고, 그런 곳이 바로 모든 천인과 아수라가 숭배하는 위대한 경전이 있는 곳일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11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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