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세존이시여 이 경은 무엇이라 이름하는 것이 마땅하오며, 우리들은 어떻게 받들어 가지오리까?(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금강경> 13장에서 수보리는 세존에게 지금까지 설한 법문의 이름을 물어본다. 책의 절반 정도가 지난 후 책의 제목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요즘 나오는 책이나 경전의 주석서 등에서 글의 서두에 집필 의도나 경전의 이름을 해석하는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하지만, 불교 경전이 구성된 과정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글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구전되던 법문을 후대에 정리한 것이다. 법문 암송은 중요한 공부다. 부처님도 당신의 법을 암송하기 쉽도록 노래(게송)로 만들어 전하고, 제자들은 그 게송을 외워 전파했을 것이다. 게송에는 이름을 붙일 것이니 경전의 이름을 묻는 질문은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정리된 경전이지만 ‘게송의 이름을 물어보는 전래의 관습’을 차용한 것이 13장에 나온 경전의 이름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구마리집은 경(經), 현장은 법문(法門)이라고 했는데, 원어인 ‘dharmaparyāya’는 법(法)이라는 뜻의 다르마(dharma)에 파야야(paryāya)가 첨부된 복합어다.

‘paryāya’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특정한 것에 나아가고자 행하는 반복적인 행위나 그런 행위에 유익한 경로로서의 과정’ 등을 의미하며 문(門)이라고 한역(漢譯)됐다. 따라서 법문은 ‘해탈 혹은 성불을 향해 나아감에 도움이 되도록 법으로 일궈놓은 체계적인 과정’이라는 뜻을 가진다.

즉, 불교의 경전은 해탈 혹은 성불이라는 목적을 가진다. 이 목적을 향해 시설(施設)된 것을 법문 혹은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정전>에서도 경전은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하는 방향로를 알게 하기 위함이요’라 하였다. 그러니 경전을 받들어 가지되 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전을 통해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고, 양성하고 사용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내 마음을 대조하고 공부하는 방향을 점검하기 위한 것이 독경이 되어야 한다. 

목적을 잃은 경전은 다만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위한 도구가 되거나, 일 없는 사람의 한가로운 놀이가 될 뿐이다.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세상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경전을 받들어 가지는 자세에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경전의 목적을 잊지 않는 것이 첫째이지 않을까. <정전> 의두요목 20조에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지묵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한 글자도 없으나 항상 광명을 나툰다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라고 하였다. 항상 광명을 나투는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을 쉬지 않아야겠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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