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세상에 패러다임의 변화를 강조한 사람은 많다. 일찍이 <과학혁명의 구조>(1962)를 쓴 토머스 쿤(T S. Kuhn, 1922~1996)은 정상 과학도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도록 권고했다. 한마디로, 최신의 과학발전을 이룬 패러다임이라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는 노력 없이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학령인구와 노동인구는 급감하는 반면에 노인인구는 증가하는 기현상을 보인다. 지구는 온난화로 인해 온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으며, 인공지능(AI)의 발달 등 과학의 발달은 날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교육도 엄청난 변화를 강요받는다. ‘왜 교육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은 그동안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대학진학률이 70%로 OECD 국가 중 상위권에 속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얼마나 지속할지 그 전망이 불투명하다. 

이제는 대학에 앞으로 생존을 위해서라도 변화하라고 주문한다. 대학만이 아니라 공교육기관 모두 예외 없이 생존을 위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과연 지금과 같은 패턴으로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 아무도 예단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 창의력을 외치지만, 정작 교실에서는 예전 방식 그대로 받아쓰고 외우는 형태에 지배되고 있다. 그것이 성적에 반영돼 대학에서 사회, 경제적 지위 획득의 도구로 사용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최고의 학부인 대학의 강의실은 시대를 거꾸로 가고 있다. 원인은 ‘가르치는 사람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은 사실 가르치는 사람으로부터의 변화를 제쳐두고 말할 수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이 일반화됐지만, 정작 교실 수업 방법에 대한 변화를 넘어 콘텐츠나 내용의 변화는 미처 그 뒤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에서 콘텐츠로 변화를 수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 역시 ‘정통성’이라는 명분의 보수주의가 꼭 필요한 변화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교육기관만 변화되면 모든 교육이 발전될 것 같지만, 이는 사실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교육이 세상을 지도하지만, 반대로 세상도 교육을 지도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가 세상을 지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현실에서는 정반대 현상도 나타난다.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입시를 개혁하기 어려운 이유는 어디 있는가? 단적으로 기득권층이 변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입으로 변화를 외쳐대기는 쉽지만, 실제 그런지 살펴야 한다.

교육의 패러다임 변화는 교육계와 사회가 손을 맞잡으면 더 쉬워질 수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 자체의 변화는 혁명만큼이나 어렵다. 만일 종교에서 혁명만큼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분파로 이어지기 쉽다. 그런 사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봐왔다. 

그러므로 교육이나 종교의 패러다임 변화를 한 국가나 사회의 모든 영역의 투사물로 보는 것도 같은 논리다. 제아무리 고귀한 교육이나 종교의 혁신도 그 사회 구성원들의 수준을 능가하기는 어렵다. 혁신이 그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총체적 반영이기 때문이다. 

교육이나 종교의 변혁이 새로운 도약이나 발전의 전기가 되려면, 무엇보다 안에서부터 스스로 변혁의 선순환을 요구받는다.

/원광대학교

[2022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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