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법 교무
김지법 교무

[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무릇 도란 그것만의 본질을 지닌 것이고 믿을 만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함이 없으며(無爲) 어떤 모양도 없다(無形). 도는 전해줄 수는 있지만 내 것으로 취할 수는 없고, 붙잡을 수는 있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도는 그 자체로 몸통이자 뿌리이며, 하늘과 땅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도는 귀신도 하느님(帝)도 신으로 만들며, 하늘과 땅도 낳았다. 태극(太極)보다 더 멀리 있으면서도 높다고 여겨지지 않고, 우주의 여섯 방위(六極)보다 아래에 있으면서도 깊다고 여겨지지 않으며, 태곳적보다 더 오래되었지만 늙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도는 생각 너머에 있다. 생각도 도의 작용이지만, 생각으로는 도의 겉모습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생각 너머의 생각’처럼 생각의 주체가 사라질 때, 생각은 바로 지금 그대로 온전하다. 도가 생각 너머에 있다는 것은 도와 생각의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지만, 홀연 생각이 일어나고, 이것과 저것을 분별한다. 그중 이 몸을 ‘나’라고 여기고 세상과 나를 분리한다. 하지만 홀연히 일어난 생각 이전에는 무엇인가? 본래 없다. 이 말이 어떠한 물질적 존재도 없다는 의미인 것은 아니다. 장자에게 도는 하늘처럼 텅 비어 있으면서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은 도 아님이 없다. 생각이 있건 없건 도는 언제나 있다. 하지만 생각이 나오면, 하나의 도는 온갖 사물로 그 모양을 이룬다. 그리고 생각에 따라 마음에서 온갖 사물을 분별한다.

도가 분별이 없을 때 드러난다는 점에서 시간을 보면,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 합당한가 생각하게 된다. 개념으로 보면, 시간의 존재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개념이 없다면, 시간이 분명히 존재할까? 공간을 좌표로 이해할 때, 시간은 방향성을 가지는 하나의 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공간이라는 것도 실은 고정되지 않는다. 시간에 따라서 공간 자체가 변하기 때문이다.

이를 공간의 좌표로 치환하면, 한순간도 동일한 공간과 사물일 수 없게 된다. 다시 시간을 독립된 축으로 보지 않고, 공간과 결합된 축으로 생각하면, 결국 전체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에서는 공간과 사물이 바로 여기 있으니, 변하는 것은 시간이라 간주한다. 달리는 기차 속에서 밖의 풍경을 보면, 모든 것은 빠르게 뒤로 멀어져간다. 이때 ‘내가 앞으로 가는 것인가, 밖의 풍경이 뒤로 가는 것인가’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마치 달리는 기차처럼, 도는 통으로 움직이고 있다. 기차 안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 같지만, 실은 기차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다. 일체(一體)인 도 속에서 나는 가만히 있고 시간이 흐르는 것 같지만, 실은 나눌 수 없는 시공간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과거도 미래도 실은 하나인 몸통이다.

/3대결산총회준비위

[2022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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