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법 교무
김지법 교무

[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도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야기를 통해 넌지시 전한다. 남백(南伯)의 자규(子葵)가 여우(女偊)에게 물었다. “그대는 나이를 먹었는데도 어떻게 안색이 어린아이처럼 생기가 넘치는 것이오?” “도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오.” “도라는 것이 배울 수 있는 것이오?” “이런! 배울 수 없소.”

여우는 도를 말로 전할 수는 있지만, 생각 너머에 있기에, 배움의 방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도를 깨닫는 과정을 설명한다. 과거 여우가 복량의(卜梁倚)에게 도를 말해주고, 그가 변화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에게 말해주고) 사흘이 지나자 그는 세상을 잊을 수 있게 되었소. 나는 이를 계속하게 했고, 이레째 되자 그는 만물을 잊을 수 있게 되었소. 이미 그는 사물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이를 계속하게 했고, 아흐레째가 되자 그는 삶 자체를 잊을 수 있게 되었소. 삶과 죽음에 얽매이지 않게 된 후에, 아침 햇살처럼 환히 꿰뚫을 수 있게(朝徹) 되었고, 또 그렇게 된 뒤에는 오직 하나뿐인 것을 볼 수 있게(見獨) 되었다오. 그러자 과거와 현재가 없어졌고, 그런 후에 죽음도 없고 삶도 없게 되었소. 살아 있는 것을 죽인다 해도 죽지 않으며, 생명을 낳는다 해도 낳는 것이 아니오. 그 한 물건이 됨은 나아가지 않는 바도 없고, 들어오지 않는 바도 없으며, 허물어지지 않는 바도 없고, 이루어지지 않는 바도 없소. 이를 ‘영녕(攖寧)’이라 하오. 이것은 어지러워 혼란스러운 가운데 평온한 것이오.”

도를 깨닫는 과정을 보면, 지금까지의 느낌과 생각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보인다. 깊은 몰입(沒入)으로 나를 잊어버리고 온통 하나에 들어가듯,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의식되지 않고, 오직 이 순간의 존재만이 두렷하다. 이것도 저것도 분간되지 않는 어둑한 밤을 지나, 어렴풋한 햇살이 비추는 순간, 세상과 나는 둘이 아니다. 홀연히 깨닫는 순간, 오직 하나만이 언제나 그대로이다. 흐르는 시간이 실은 본래 하나의 몸이라는 것을 느끼고,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님을 깨닫는다. 애초에 도와 내가 둘이 아니었구나. 만상(萬象)이 어지러이 있는 것 같지만, 모두 나 아님이 없다. 물방울 하나에 모든 세상이 들어있다. 도는 처음부터 여기에 그대로 있다. 모든 사건의 시작은 ‘나’라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잊어버리자, 혼란스러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지금 살아 숨 쉬고, 이 글을 읽는 나는 분명한데, 무엇이 진실일까? 데카르트가 말하듯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부정하기 어려운데, 그 ‘나’라는 생각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 생각이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생각 없이도 존재하는 것, 이것이 도다.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도 할 수 있듯, 이미 의식하지 않은 한 물건은 본래부터 모든 것을 함 없이 하고 있다. 스스로 그렇게.

/3대결산총회준비위

[2022년 11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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