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훈 교무
길도훈 교무

[원불교신문=길도훈 교무] 과거에는 선정에 들어도 선정인 줄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수행을 놓지 않고 나아가는 수행자만이 선정이 잦아지며 영계에 눈이 뜨이고 지혜가 솟아났다. 이것마저 상시로 열려 확연해 지고 나서야 견성을 하고 도인의 반열에 올랐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이러니 선정에 들기만 해도 견성이니 도인이니 하여 그 명칭에 따른 무게감이 컸다. 정산종사의 견성 다섯 단계가 온전한 정도다. 이 단계는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 진공의 소식을 아는 것, 묘유의 진리를 보는 것, 보림하는 공부를 하는 것, 대기대용으로 이를 활용함을 일컫는다.

그런데 요즘은 좌선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때문인지 선정에 드는 사람이 많다. 또는 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도 한두 번의 선정 체험을 인정받을 수 있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이러니 선정만으로 수행 수준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그저 수행의 문지방 너머로 한 걸음 걸친 정도이니 말이다. 이렇다 해도 얕은 선정이든, 중간 선정이든, 깊은 선정이든 선정에 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선정의 문이 대중에 열렸음을 의미한다. 선정의 길을 알기 위해 수백 리를 찾아다니지 않고서도 일상생활에서 수행하면 되는 열린 시대이기는 하다.

얕은 선정은 시공간과 몸을 잊은 채 허공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중간 선정은 심연의 깊은 곳에 잠긴 채 영혼이 푹 쉬어 맑게 가신 정도이다. 그리고 깊은 선정은 시공간을 넘어서 깊은 홀로 빨려 들어가 허공의 빛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도 한두 번에 그친다면 한때의 추억에 불과하다. 또한 앉아서만 선정에 있다가 출정해서 여전히 관념과 욕심과 착심의 의식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면 이 선정은 부작용 없는 마약과 다름없다.

더욱이 선정이 선정다우려면 선정에 상시로 깊이 들어 선정이 내면화되고 일상의 기운으로 단련되어야 한다. 나아가 선정에 이르는 힘으로 영계를 통하고, 궁금한 진리와 세계를 보니 마음에서 미혹함이 사라진다. 이로써 선정에서 선정을 타고 들어가 깊이를 더하고 또 다양한 선정의 세계를 체득하며 허공의 기운에 하나가 되어 열반에 든다. 이 또한 익고 익으면 선정에 들어 우담발화가 피어오른다. 비로소 진정한 선정을 닦았다고 이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된 것은 아니고 무색계 사선정의 마지막 단계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는 이르러야 한다. 이것은 앉아서 이루는 것이 아닌 세상의 일상에서 이룰 수 있다. 열반이 일상에서 바탕으로 존재돼야 한다. 불교에서 이것을 제대로 해석한 것을 아직 볼 수 없는 것은 이 단계에 이른 수행자가 아직 없거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선정에 이토록 힘을 얻으면 무루계(無漏界)는 어렵지 않다. 선정에서 깊이 푹 쉬면 된다. 이것도 다하면 세상에 깨어 존재하게 되니 수행이란 끝이 없다.

[2022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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