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훈 교무
길도훈 교무

[원불교신문=길도훈 교무] 선정에 들기를 반복하며 초월적인 부분이 열리기도 한다. 육근으로 보고 듣고 맡을 수 없는 것 등을 할 수 있게 되고, 궁금해하던 진리와 이치와 일에 대한 것이 열려 알게 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정의 경지를 일상으로 발현시키는 것이다. 좌선 때 입정이 되었다가 출정할 경우 바로 일어나 움직이기보다는 눈 감고 선정의 심법과 기운이 표면의식으로 올라와 존재하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어서 눈을 뜰 때 그 의식의 느낌으로 사물을 접응하며 존재하여 일상의 기운이 되도록 한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선은 선이고 생활은 생활인 것에 그칠 수 있다. 지난 습성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선정에 든 보람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자신이 선정에 드는데 일상에서의 기운에 맑은 영롱함이 없고, 심법이 관념과 욕심과 착심으로 점철되고 있다면 수행의 본의부터 다시 되짚어 볼 일이다.

선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천지 기운과 하나 된 천지합일로 천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천지와 하나 된 것은 천지와 하나라는 관계성을 이해한다거나, 좌선할 때 기운이 커지거나 비워져서 천지와 하나 된 그런 느낌 정도를 일컫는 게 아니다. 천지 속으로 들어가 천지를 알고, 사물에 들어가 사물을 알고,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접응하는 느낌과 아는 정도의 경지를 일컫는다. 소태산께서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 한 것도 이런 경지다. 이는 격외의 성리를 밝힌 차원이 아니다. 

다만, 체험하여 알기 전까지는 격외 성리로 공부하고 이해하며 연마하는 정도에서 살피는 것이 나쁘지 않다. 이 글은 소태산께서 변산구곡로에서 실제 돌이 되어 서서 물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물이 되어 흐르고 물소리를 듣고 물의 느낌의 심경을 표현한 글이다. 관념의 시비가 끊어진 하나의 자리가 실체 되어 아는 이것은 무색계 사선정 가운데 어디에도 주한 바 없이 허공이 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 온전한 경지와 비견된다. 이로써 모든 번뇌와 분별뿐 아니라 몸까지 없는 적정(寂靜)의 경지인 무여열반(無餘涅槃)에도 이를 수 있다.

천지합일도 좌선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수행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일상에서 살아 움직이기까지 해야 온전해질 수 있다. 이렇게 온전해진 사람은 마음속에 천지가 온전하게 배어 삶에서 그대로 우러나온다. 진리와 벗하기에 사소한 이익의 여부로 움직이기보다 대의의 근본이 올곧게 살아있는 면모가 보일 수밖에 없다. 대의의 근본에 올곧다면 자칫 고집스러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진리의 근본과 전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 움직임은 변화무쌍한 것처럼 진리를 진정으로 벗하는 사람은 대의가 있으면서도 품이 넓고 유연하다.

[2022년 1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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