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시공간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나 분야에는 보수와 진보가 함께 존재해 왔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변화를 싫어하고, 진보는 변화를 수용하는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본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깊이와 폭에서 진보와 보수를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진영논리를 떠나 누구라도 어느 부분은 변화를 거부하는 반면, 어느 부분은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보든 보수든 식생활에 있어 전통문화를 수용할 수 있지만 젊은 세대일수록 자유로운 선택지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진보든 보수든 그 사회의 산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종교와 교육에서 진보와 보수를 보는 관점도 그 틀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종교는 정통성 문제를 거론하는데 익숙한 편이다.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로부터 분파의 시발점이 된 사례를 기억할 수 있다. 자기가 속한 종단이나 종교가 적어도 정통교단, 정통종교라는 인식이 깊게 자리하면 할수록 배타적인 잣대를 적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중용이니, 대화, 타협 등의 용어가 낯설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변화와 개혁을 외친다. 하지만 막상 자신을 변화나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 허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종교나 교육의 기득권층은 변화에 매우 거칠게 저항한다.

예를 들면 강단이나 연단은 권위를 상징한다. 누구도 함부로 교실의 강단이나 성직자 연단의 개혁을 거론하지 않거니와, 주장해도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상상해보자. 학생은 수업 중에 선생님께 질문할 수 있지만, 누가 성직자의 연단에서 설교나 기도에 대해 감히 질문할 수 있을까? 우리 정서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물론 교실의 강단이나 종교의 연단에서 이뤄지는 문화를 개혁하려면 교사나 성직자가 먼저 수용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이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된다면 머나먼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 교사의 수업권을 거론하면 교권침해라거나, 성직자의 연단 설교를 거론하면 성직에 대한 권위의 도전으로 비치지 않는지 의문이다. 

물론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수업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을 묻는 예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변화나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학생들의 반응이 변화를 촉발하기에는 역부족인 면도 있지만, 정작 변화를 주도해야 할 교사들이 미온적이라면 더욱 어렵다. 마찬가지로 성직자의 연단에서 설교나 기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변화를 촉발하는 경우는 더욱 기대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수용자인 신도나 교도들이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기 생각이 있지만 이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특정 교사나 성직자가 이런 부분에 모범적인 사례로 주목받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모집단(母集團)이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교육이나 설교가 비록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이뤄지더라도 그것이 교육이나 종교 모두를 대변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심하면 “말만 잘한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언어,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따른다.

교사나 성직자가 학생이나 교도를 공식적으로 만나는 공간이 ‘강단’과 ‘연단’이라면, 여기에서의 변화는 쌍무적일 때 가능하다. 변화를 거부하는 자와 수용하는 자가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원광대학교

[2022년 1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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