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수보리야 부처가 말한 반야바라밀이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금강경> 13장 중)

<금강경>의 제목을 설명한 부처님은 수보리와 문답을 통해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또 이어서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없다’고 말한다. 조금 전에 당신이 이야기한 법문의 제목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 이름을 말하고 다시 반대되는 말을 하니 후래의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지금까지 설명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은 실상인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일 뿐이고, 당신이 설하는 법도 역시 실상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는 부처님의 말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세계를 설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을 100%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을 말과 글로 표현해 보지만 속 시원히 내 마음을 다 드러낼 수 없다. 그러기에 그림으로 음악으로 춤으로 표현해 본다. 불완전하지만 그것이 말로 할 수 없는 마음 깊은 곳의 진실을 드러내 준다. 그래서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 아닌가 한다.

부처님은 <금강경>이라는 언어로 우리 마음속의 진실을 표현했다. 부처님의 마음속에 있는 ‘금강불성’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피안의 세계로 가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금강반야바라밀이 될지언정, 나의 금강반야바라밀이 될 수는 없다.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어그러진다. 이 자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실상의 자리다. 이 자리는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금강경> 구절에 집착하고 각자 마음속의 불성을 보지 않으면 부처님의 법문은 번뇌를 더하는 말장난이 되고 만다. “불조(佛祖)들의 천경만론은 마치 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는 비유가 너무 적실하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살핀다. 거울 속의 나는 영상일 뿐,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렇지만 거울을 통해서 내 얼굴을 살피고 얼굴에 묻은 티끌을 떼어낼 수 있다. 만일 거울 속의 얼룩을 보고 내 얼굴이 아니라 거울의 얼룩을 지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부처님이 당부하는 것은 <금강경>이라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라는 것이지, <금강경>이라는 거울을 가지고 시비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수많은 티끌을 보면서 그 티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티끌이 드러나는 내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티끌이 곧 <금강경>이 되고, 불조의 천경만론이 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1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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