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말한다. “나는 법을 설한 바가 없다.” 법을 설했으면서 왜 설한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일까? 설법은 언어라는 상을 통해서 불완전하게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생의 보배라고 할 수 있는 부처님의 법문도 잠시 인연에 따른 이름이 있을 뿐이고, 연이 다하면 없어지는 임시적인 도구다. 법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가장 작은 것으로 생각하는 티끌(微塵)도 그러하고, 가장 큰 것으로 생각하는 세계도 그러하다. 그저 이름일 뿐이다.

삼천대천세계에 티끌이 가득 차 있다. 그 수가 한량없다. 세계라고 부르고 티끌이라 부르지만, 이름일 뿐이다. 티끌이 곧 세계다. 세계와 티끌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일 뿐이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세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경계도 티끌이다. 나를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는 무한한 경계, 그 경계와 반연(攀緣)하는 무수한 생각들, 내 마음속의 번뇌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티끌과 같다. 티끌은 티끌이 아닌 것과 같이, 경계도 사실 경계가 아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고자 원불교를 열었다. 그런데 파란고해는 파란고해가 아니고, 낙원도 역시 그렇다. 우리가 맞이하는 경계는 고통의 바다라 부를 수도 있고, 은혜의 바다라 부를 수도 있다. 단지 이름일 뿐이다. 

이름일 뿐이지만, 우리는 고해가 아닌 낙원의 삶을 원한다. 마음속에 가득 찬 먼지를 가라앉히고 싶어 한다. 혜능은 <금강경구결>에서 말한다. “중생들은 예외 없이 망념의 먼지들을 덮어쓰고 있는데, 그것들은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며 불성을 가로막고 해탈을 방해한다. 만일 염념(念念)이 반야바라밀을 올바로 수행하고 무착(無著) 무상(無相)의 수행을 닦아 나갈 수 있다면 먼지 같은 망념이 곧 청정한 법성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는 먼지 같은 망념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먼지를 실제로 여기고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면서 산다. 세상은 평온한데 스스로 상(相)을 지어서 괴로워한다. 이는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 감옥이 각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결정하며, 우리는 결코 자신의 눈높이 이상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생각 생각(念念) 반야바라밀을 수행해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구원되지 않는다. 세상에 먼지가 가득하다고 비판만 하는 사람, 입만 열면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은 보살이 아니다. 보살은 불평을 말하기보다 불합리하고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무슨 작은 일이라도 성취해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티끌이 티끌이 아니고, 세상이 세상이 아니다. 온 세상의 티끌이 모두 청정한 법성일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1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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