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부처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신앙을 하고,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수행을 할 수 있다. 신앙이란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아 부처를 부처로 대하는 태도나 마음을 말한다. ‘부처가 어디있는가’ 이 질문에 찰나의 망설임 없이 명확한 부처를 보여줄 수 있는가? 깨닫기 전에는 부처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 올바른 신앙을 할 수 없다. 

수행이란 마음 있는 곳을 정확히 알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사는 것이다. ‘마음이 어디에있는가’ 이 질문에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명확한 마음 있는 곳을 보여줄 수 있는가? 마음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참된 수행을 할 수 없다. 이름하여 오염수다. 

어허! 그럼 깨닫기 전에 하는 일체의 신앙수행은 아무 필요도 가치도 없으니 깨달음이 찾아오기만을 손 놓고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냐고 따지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깨닫기 전에도 인과를 믿어 일체만물과 허공법계에 불공을 잘하면 사는 동안 돕는 인연도 많아지고 하는 일마다 수월하며 여러 가지 복이 따르게 되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깨닫기 전에도 수행을 열심히 한 사람은 기질이 잘 단련돼 있어서 깨달은 후에 힘을 얻는 속도가 그에 비례하여 커진다. 그래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단, 깨달음에 대한 발원과 정성을 놓지 않은 채 그것들을 해야 한다.

깨달음은 그냥 답을 정확히 안 것뿐이지 겉으로 바로 변화가 나타나거나 힘이 생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또 이렇게 반문하고 싶겠지. 언제 될지도 모르는 데다 별다른 변화도 없다면 뭐하러 그 어려운 깨달음을 꼭 얻어야만 하는가 하고 말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운전만 열심히 해서는 
결코 불지에 당도할 수 없다.

앞으로도 입이 아프도록 거듭 말하겠지만, 깨달음을 얻어야만 영생토록 괴로움의 문제를 다 벗어나 자유와 해탈의 경지에 머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 없는 신앙·수행을 열심히 하면 복은 좀 받고 기질은 좀 변화될지는 몰라도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영생토록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언제 갈지 모르는 인생인데다, 또 사람으로 온다는 보장 없으니 이것이 급선무고 중대사다. 

깨달음은 시절인연으로 한순간에 온 것뿐, 숙겁을 통해 쌓인 업력과 습관은 단시일에 녹지 않는다. 업력과 기질은 여전히 힘이 세다. 이때가 바로 깨치기 전 신앙수행이 효력을 발하는 지점이다. 깨친 후의 변화는 숙세를 통해 공들인 신앙수행의 정도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않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입 벌리고 누워 있어선 안된다.

깨달은 이후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들은 숙겁을 통해 어느 쪽을 많이 단련했느냐에 따라 세 방면으로 나눠지는 것 같다. 수양면에 현저히 힘을 얻는 수양파, 깨달음을 전하는 일에 능해지는 연구파, 취사에 큰 힘이 쫙 생기는 취사파다. 실행으로 큰 변화를 보이는 이가 있다면 취사파일 것이며, 이들이 제일 재미를 보며 산다. 진리가 훤해져 말이나 글로 깨달음을 인도하는 쪽에 유독 밝은 걸 보면 나는 확실히 연구파인 것 같고, 변화는 참 더디다.

겉으로 별 변화가 없는 이들도 자유, 해탈이라는 영생의 문제 해결은 이미 시작됐다. 영생을 놓고 보면 한 생도 찰나 지간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 조금 빨리 가고 말고가 무슨 대수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운전만 열심히 해서는 결코 불지에 당도할 수 없다. 목적지를 알고 모르고가 결정적이라는 정확한 사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1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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