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부자들 들으면 기겁할 말이겠지만 부자는 천당 가기 어렵다. 익히 아시듯 이건 <성경> 말씀의 일부다. 아, 물론 절대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극히 어렵단 말이니 스스로 부자라 여긴 그대여 노여움을 내려놓으시라.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통용되는 세상에 억울하고 서러운 누군가에겐 이런 구절로나마 조금의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렇다고 뭐 가난하면 다 천당 간다는 뜻도 아니니 ‘가난하길 다행이다’ 안도하는 딱한 이는 없겠지.

부자란 단편적으로 재물만 많다는 뜻이 아니다. 안 되는 게 없이 만들어주는 마력을 지닌 것이 재력이다. 학력도 재주도 권력도 신분도 명예도 외모도 건강도 다 갖게 해주며 죄를 지어도 다 빠져나가게 해준다. 부자들은 그래서 억울하고 서럽고 힘들고 괴로울 일이 적다. 사는데 큰 지장 없다는 바로 이 점이 천당 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다. 왜냐.

괴로움이 많으면 그걸 벗어나려고 온갖 몸부림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깨달음에 대한 언어가 아주 크게 들려와 결국 깨달음을 얻어 천당에 간다. 부자들은 괴로울 일이 별로 없으니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해주는 깨달음에 대한 말이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 때문에 깨달음을 이루려는 원을 세우지 않을 것이라 결국 깨치지 못하여 천당을 가지 못한다. 

하여 ‘괴로울 일이 거의 없는 부자는 천당 가기 어렵다’고 해석하는 게 나의 견해다.

 

자만심 강한 이들은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원이 서지 않는다.
원이 없으니 
이생에 깨달음 얻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천당 가기 어려운 부자를 좀 확대해석하면 뭐든 좋은 조건을 갖춘 이들이다. 머리가 좋거나, 재주가 있거나, 남에게 인정받거나, 일이 잘되거나,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다. 남들이 인정해주고, 웬만큼 잘 풀리고, 세상이 살만하다 여기는 사람은 삶이 무난하여 거기에 만족하기 쉽다. 이런 이들은 깨달음을 발원하기가 어렵다. 삶이 무난하지 않고 힘들어야 괴로움을 해결할 길을 찾을 것이며, 찾다 보면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기가 쉬워진다.

천당 가기 어려운 한 부류를 더 추가하면, 자만심으로 찻잔이 꽉 차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성자의 말씀을 자기식대로 해석해 노력은 제법 하는데, 웬만큼 안다는 자만심 때문에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 성자가 되어야지 성자의 말씀을 전달하고 인용만 하고 살면 깨달음에서 멀리 있으며 성자의 뜻에 위배된다. 

부자들이나, 삶이 무난한 이들이나, 자만심이 강한 이들은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원이 서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원이 없으니 이생에 깨달음 얻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이생에 얻지 못하면 다음 생을 장담 못하니 영원히 얻지 못할 확률이 높다.

물론 이런 이들이 다 천당 가기, 깨달음 얻기가 불가하다는 건 아니다. 삶이 무난해도 거기에 눌러앉지 않고 깨달음을 발원하는 이가 있다. 소위 지혜로운 이다. 지혜로운 이는 좋은 조건에 속거나 빠져버리지 않고 그것을 보은의 도구로 잘 활용하며, 깨달음에 대한 원을 굳게 세워 결국 해결하는 사람이다. 그대가 드물고 드문 지혜로운 부자이길 바란다.

부자에겐 어렵고 괴로움 많은 이가 깨달음에 가까워 천당 갈 조건이 갖춰져 있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역설이며, 이 얼마나 은혜롭고 통쾌한 괴로움인가! 괴로움에 몸부림하는 그대여! 그러니 절망하거나 목숨을 이럴까 저럴까 하는 대신 가장 가까이 있을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라. 그 발원 하나 일으키면 깨달음 얻어 천당 가는 일은 이미 따논 당상일 터이니….

/변산원광선원

[2023년 1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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