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깨달음을 얻겠다고 맨날 법당에 틀고 앉아 있는 마조를 보고 스승 회양이 마당에서 벽돌을 박박 간다. 그 소리가 심히 거슬린 마조가 벽돌을 뭐하러 가느냐 물으니 거울을 만들거라 한다. 그걸 간다고 무슨 거울이 되겠냐 하자, 회양은 좌선한다고 깨닫겠냐고 일갈한다. 

좌선을 열심히 하면 깨달음을 얻을 거라는 속절없는 희망을 못 벗어나는 수행자들이 참 많다. 어떻게 해야 깨달음이 오는지, 어떻게 해야 상대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지를 모르니 하릴없이 좌선에 기댄다. 수양에 반드시 필요한 수행이긴 하나 좌선한다고 깨달음 얻는 건 아니다. 깨치기 위해 앉아있다면 벽돌 갈아 거울 만들기다. 

이런 말을 하면, 분명 방금 수양에 반드시 필요한 수행이라 전제했건만, 그럼 지금 좌선 하지 말란 소리냐며 따지는 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좌선이 깨달음과 직결되진 않는다는 말이며, 좌선이 깨달음의 유일한 길도, 최고의 길도 아니란 것이지 하지 말란 말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좌선 중에 깨쳤다면 그에겐 깨칠 시절인연이 된 것이지 꼭 좌선 때문이 아니다. 좌선해서 도달한 이라면 길을 걷다가도,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새싹 돋는 걸 보다가도, 거울 보다가도, 짚신 세 벌에도, 어떤 기연을 통해서라도 열렸을 것이다. 그 툭 터진 때가 하필 좌선 중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조금만 더 깊은 단계에 들어가면 깨달음에 도달할 거라는 헛된 믿음 아래 엉덩이에 붙는 굳은살로 실력을 삼으며 하세월하는 이들이 많다.
 

깨달음 위한 
서원의 신분의성,
머지않아
성품자리에 도달한다

혹, 좌선 중에 열렸다는 이들은 하나의 몰입체험을 견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표현이 전부를 대변하진 못하겠지만, 예컨대, 우주가 텅 비어 나 하나로 가득한 느낌, 물아지경, 삼매 상태에서 오는 굉장한 희열감을 깨달음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는 나를 잊을 때 오는 희열감으로 독서, 게임삼매 등 많은 삼매 중 하나며, 다소 고차원의 삼매체험일 뿐이다. 아무리 차원이 높아도 어떤 몰입이나 삼매상태 자체를 견성이라 하지는 않는다. 

산삼인지 도라지인지, 지금의 이 체험이 깨달음이 맞는지 아닌지 비교할 무엇이 없고, 그걸 증명해 줄 이가 없으니, 이게 그건가 보다 하고 고이 품고 살게 된다. 시비를 논하려는 게 아니라 애먼다리 긁다가 오히려 실상을 못 보게 하는 장막이 될까 저어 되어 하는 말이다.

견성이 아닌, ‘어쩌다 마주친 그대’처럼 오는 이런 선 체험은 다시 그 상태를 느껴보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다. 자성으로 곧장 돌아갈 길을 모르니 자성반조가 불가능하다. 스스로 정확히 확인한 깨달음은 언제든 돌이키면 그 자리, 자성반조가 된다. 

깨달음은 대체로 선각자의 글이나 말, 화두, 궁구, 사유 등 연구의 결과로 온다. 깨달음을 위한 서원 아래 화두를 놓지 않고 신분의성으로 계속하는 이는, 머지않아 무궁한 보물과 만능만지의 자리, 일원, 성품자리에 다 도달하게 되어있다. 사람마다 열리는 속도가 달라서 단 10분 만에 도달하는 이도 있으며 몇 년 걸린 이도 있어 케바케(Case by case)이지만, 놓지 않고 가면 다 된다. 좌선은 평생을 해도 참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어느 구름에 비 들었을지 모를 일, ‘이게 대체 뭐지?’ 궁구하며 계속 두드리면 너나없이 다 열린다. 어디를 어떻게 두드리면 되는지를 이제 곧 인도하려 하는데, 이게 너무 쉽고 싱거워 안 믿을게 심히 걱정이라, 서론이 이토록 장황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2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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