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깨달음을 얻어야겠다는 필요성도 제법 느꼈고 마음의 준비도 다 됐는데, 자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는거요? 

어서 그 특별한 비법으로 나 좀 깨치게 해달라는 기대에 찬 이 눈빛들! 자칫 맘대로 안 되면 금세 시들해지기 십상이니 욕속심도 불신도 다 금물이다. 간절한 화두 하나 툭 던져 놓고 강태공처럼 때를 기다리라. 시절인연이 되면 우주에 가득한 대어가 탁 걸려들 것이다. 강태공은 종종 실패하지만 깨달음은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믿으라. 

그리 쉽다고 큰소리쳐 놨는데 막상 이 간절한 눈빛들 앞에서 그걸 더구나 말이 아닌 글로 설명하려니 참 막막하긴 하다. 깨달음자체는 때가 되면 쉽게 일어나지만 그걸 여차저차 일러서 그 자리에 도달하도록까지 인도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니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언어로 표현한다는 게 어디 쉽겠는가. 그런 까닭에 스스로는 알았어도 표현하는 것이 심히 어려워 입 다물고 사는 이가 대다수다. 혹 그 자리를 잘 설명하는 이들도 있지만 상대를 열리도록 해줄 수 있는 확률은 또한 하늘의 별따기다. 그 어려운 일이 다 가능한 걸 보면 이건 필시 숙겁의 서원이지 이생 일은 아닌 듯 싶다.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일대일로 인도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다. 상대방의 눈동자가 흔들림 하나 없도록 집중력을 지속시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차선책으로 대중이 함께 참여해 일대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온라인 깨달음 학교 개설을 준비 중이다. 

간절함이 지극하고 시절인연이 된 어떤 이들에겐 깨달음에 대한 이런 적확한 글만으로도 턱 열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 그러길 염원하며 써가는 글이다. 못해도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발원 하나 일으켜 화두를 놓지 않고 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여파는 불가사량(不可思量)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깨닫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깨달음, 즉 견성이란, ‘성품을, 진리를 본다. 혹은 깨닫는다’는 의미다.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시중에서 가벼운 용법으로 쓰이고 있어 근본적 깨달음을 잘 담아내기 어렵다. 종교가에서 일컫는 깨달음의 비중은 차라리 견성이란 말이 훨씬 더 적중할 것 같아, 좀 낯설고 부담될 수 있지만 가급적 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깨달은 이는 성자나 중생이나 동일한 것을 본다. 위력의 크기는 달라도 같은 것을 본다. 살짝 찍어 먹었든 저 호수 크기의 물을 한 번에 맛봤든 물맛은 동일하다. 물맛도 동일하고 그 물맛에 대해 말하는 것도 동일하기에 정말로 맛본 이는 다 통하게 되어있다. 같은 것을 맛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물을 진리나 성품으로 대입하면 된다. 

물을 직접 마시는 것, 즉 성품자리 자체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견성이다. 물을 본적도 없고 무엇인지도 모르던 이가 그 효능과 필요를 알았다면 물을 찾아 직접 마시는 것이 중요하지, 물에 대해 제아무리 많은 걸 듣고 이해한들 물맛 자체를 알 수는 없다. 물을 이해하는 것보다 마시는 쪽에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머리로 이해하려고 수고와 시간을 낭비할 일이 아니라 그냥 마시면 된다. 머리에 든 것이 없을수록 견성은 빠르며 입력물이 많을수록 다시 걷어내야 하니 고된 수고를 해야 한다. 머리에서 찾지 말고 눈동자의 미동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대로 답이 나오게 하라. 이해에 만족 말고 자신의 눈으로 곧장 도달하라.

/변산원광선원

[2023년 2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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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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