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원.
숭산원.

양하운 대사모의 사가
총부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청하원이 보이며, 맞은 편 안쪽으로 기와집이 보인다. 이곳이 숭산원이다. 

숭산원은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의 살림집이 있었던 곳이다. 장남 숭산 박광전 종사가 원광대학장 재임 시 이 자리에 다시 집을 짓게 돼 ‘숭산원’이라 칭하게 됐다. 숭산종사의 열반 뒤 교단에 희사하게 돼 현재는 교정원장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 숭산원은 양하운 대사모가 익산 총부 구내 남의 집 곁방에서 자식들과 살다가 원기22년(1937)경 진정리화가 자기 집을 희사하고 경성으로 귀가함에 따라 그곳에 안주하게 됐다. 지금은 기와가 올라선 집이지만 당시에는 초가였다.

양하운 대사모는 소태산 대종사의 부인으로 남편의 구도(求道) 뒷바라지는 물론, 자녀 양육과 살림살이 등 사가 일에 전담했다. 원기14년(1929) 익산 총부에서 생활할 당시 배산과 황등으로 소작답을 얻어 경작을 하고, 동네 품팔이 빨래품 등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살았다. 또한 총부 대중의 공동작업이 있을 때는 언제나 빠지지 않고 함께 했고, 여느 사람의 배 이상의 작업을 해냈다.

하루는 교중 일을 보고 돌아가는 양하운 대사모에게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들이 식사를 하고 가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공중에 빚을 지면 안 된다’며 소태산 대종사가 그 청을 뿌리치도록 해 사가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오직 공심으로 일관한 삶이었고, 부군이자 스승이었던 소태산 대종사의 말에 일호의 사심이 없었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의 사가 일을 전담하며 온갖 수고를 다하는 것을 보고 일반교도가 이를 죄송히 여겨 거교적으로 성금을 모아 그 고역을 면하게 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는 “그 말도 그럴 듯 하나 중지하라. 이만한 큰 회상을 창립하는데 그 사람도 직접 나서서 창립의 큰 인물은 못 될지언정 도리어 대중의 도움을 받아서야 되겠는가(하략)”라고 법문했다. 이 내용은 〈대종경〉 실시품 25장에 수록됐다.

〈회보〉 64호에서는 ‘기한(飢寒)을 이기시며 공사를 위하시는 우리 사모님 생활’이란 제목으로 양하운 대사모와 그 자녀들의 간고한 생활상을 소개했다. 양 대사모는 “이와 같이 곤란하게 살아도 혹자는 종사님께 회원의 것을 걷어다가 자기와 처자가 호화로운 생활이나 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가질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는데 더구나 편히 먹고 잘 입고 호강스럽게 살아보소. 천만인의 고혈을 빨아다가 자기 이욕만 채운다고 험악한 말이 많을 것일세”라고 말해 기록에 남았다.

양하운 대사모는 평생 소태산 대종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부군이 사가의 일로 근심하지 않고 오롯이 새 회상 창업에 헌신할 수 있도록 내조했다. 제1호 정토회원이며 정토원훈(正土元勳)으로 모든 정토회원의 사표로 기억되고 있다.

[2023년 3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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