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꿈도 없이 깊이 잠들 때가 있다. 그때는 모든 의식이 끊어진다. 그런데도 어떻게 알고 계속 숨을 쉰다. 의식이 없는데도 들이쉬고 내쉬기를 정확히 알고 반복하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의식 너머에 정확한 간격으로 숨을 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의식이 없는데 오장육부가 작동되게 하며, 알아서 소화를 시키고 모든 세포들을 운영하는 어떤 주관자가 있다. 어떤 이는 무의식이라 부르지만, 알고 하기 때문에 식(識)이다. 눈을 떠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내 의지로 내가 작동시킨다고 여길 수도 있다.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자기가 모든 것을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으며 산다. 지혜가 부족한 이는 이런 근본 지혜가 필요한 부분에서 꽉 막혀 먹통이 되거나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질문에 바로 의심이 딱 걸리며 궁금해지는 마음을 낸다면 지혜가 밝아 깨달음의 준비가 된 이들이다. 

깨닫지 못한 보통 중생들은 생각·감정·분별·의식 같은 정신적 측면과 이 육체를 합해 자기라고 믿고 산다. 이것 또한 내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 헛것만을 자기라고 설정하여 애지중지 모시고 산다. 사실 내가 아는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포괄한 지극히 위대한 어떤 것이다.
 

물방울이 곧 바다다.
어느 물방울도
바다를 떠날 수 없고
바다는 물방울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 만물은 
물방울(개령)이 아니라
바다(대령)다.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차원이 있다. 바로 생멸하는 마음과 생멸 없는 마음이다. 일어났다가 사라져가는 마음과 생멸 없이 계속되는 마음이 있다. 생각·감정·정신·마음·의지·의식은 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멸하는 마음이다. 이런 생멸하는 마음을 개령, 수·상·행·식이라 한다. 끊어짐이 있는 것은 나로 삼을 수 없으니 무(無)수·상·행·식이다. 즉, 개령은 내가 아니란 뜻이다.

꿈도 없이 잠잘 때는 모든 의식이 다 끊어져 있다. 정신도 의식도 생각도 감정도 분별도 나라는 관념도 없는데 여전히 나는 계속된다. 온갖 의식이 끊어져 있는데 계속해서 육근을 운영하고 있는 바탕 마음이 있다. 여여하게 계속 배경으로 있으면서 생멸하는 마음을 일어나고 사라지게 만드는 바탕 마음을 심지, 성품, 자성, 본성, 체성이라 한다. 깨달음, 즉 견성은 이 생멸 없는 마음, 성품을 본 것이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이 생멸 없는 성품을 먼저 찾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마음공부는 생멸하는 마음만을 보기 때문에 깨달음이 일어날 수 없다. 깨달음을 얻은 후 생멸하는 마음을 다스려야 맞다. 생멸하는 마음을 아무리 다스려도 깨달음은 얻어지지 않으니 오염수라 한다. 생멸 없는 마음을 깨닫고 난 후 생멸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참 수행이다. 생멸하는 마음을 개령, 생멸 없는 마음을 대령으로 보면 된다.

영은 하나의 법신불이라 개령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텅 빈 허공이 어찌 나눠질 수 있는가. 개령이 따로 있다고 믿어 나와 너, 일체를 나누기 때문에 모든 고통이 발생한다. 견성은 개령이 따로 있지 않고 대령만 있음을 아는 것이다. 소가 곧 대며, 개령이 곧 대령이다. 분리된 개령은 없다. 그냥 하나임을, 따로 없음을 믿으면 곧장 깨달음이다. 물방울이 곧 바다다. 어느 물방울도 바다를 떠날 수 없고 바다는 물방울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 만물은 물방울(개령)이 아니라 바다(대령)다. 

일원은, 본원이며 심인이며 성품이다. 일원과 성품은 동일자다. 성품(나)이 곧 일원이며 신이다. 일원상의 진리 첫 소절에 대명같이 탁 밝혀 주신걸 맨날 믿는다 말은 하면서 실상 머리로 이해만 하지 믿지를 않는다. 진실로 믿었다면 견성은 식은 죽 먹기였을 터!

/변산원광선원

[2023년 3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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