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원 소장
이준원 소장

[원불교신문=이준원 소장] 인공지능은 스스로 의문을 품는가? 아는 것도 돌다리 두드리듯 확인성 질문을 하는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가? 그리고 질문에 답하더라도 “검색한 한도에서 답한다. 이런이런 사항은 잘 모르니, 확인이 필요하다”며 신중하고 겸허하게 답하는가? 과문해서 그런지 이런 이야기를 아직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인공지능의 한계는 바로 이런 점에 있지 않을까?

어떠한 지식과 정보, 데이터도 불완전하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은 단 하나의 현상, 단 하나의 값을 지닌다. 그러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지금처럼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대는 하나의 행위가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전개되는 양상과 요구되는 최적값을 예측하기 힘들다. 한마디로 안개처럼 애매모호하다. 때로는 칠흑 같은 어둠이다. 논리적 분석의 한계다. 

하늘이 무심하다 하여 하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사후세계를 보고왔다고 하는데 이를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나는 도저히 못한다고 할 때가 있는데 못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현대 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 경제학의 불가능성 정리.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적어도 하나 이상 있다”는 수리논리학의 불완전성 정리 등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과연 완벽한 것이 있는가?

삶은 아이러니다.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고 때로는 위선이 진선을 이긴다. 삶은 딜레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윤리적 가치 앞에 갈등한다. 삶은 패러독스다. 약이 독이 되고 독이 약이 되기도 한다. 정답이 있는가? 무유정법(無有定法)이다. 인공지능이 아이러니, 딜레마, 패러독스를 알까? 인공지능이 상담 카운슬링을 할 수 있겠지만, 정서적 교류와 신뢰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인류의 진화, 문명의 발달은 의문과 질문의 힘이었다. “이 뭐꼬?”라는 의문과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라는 질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몸이 없다면 마음은 어디에 머물까? ‘어찌할꼬?’를 혼자 하는 것과 더불어 하는 것 중 어떤 편이 현재의 당면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까? 

소태산의 십상(十相), 그 시작은 하늘을 보고 의문을 일으켜 품은 ‘관천기의상(觀天起疑相)’이다. 원기108년 대각개교절을 맞이해 의문과 질문의 힘을 다시 생각해 본다. 
‘하늘가는 저구름아 너가는곳 어디메냐 관천기의 강변입정 장항대각 하온후에 만고일월 일원대도 전무후무 일원회상 무궁할사 우리교운○.’

/솔로몬연구소

[2023년 4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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