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철 교무
조경철 교무

[원불교신문=조경철 교무] 오늘은 ‘불공’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과거 우리의 어머니들은 부처님께 불공드리러 간다며 공양거리를 챙겨 산중의 절을 찾곤 하셨습니다. ‘부처’란 한 마디로 ‘깨달은 자’를 의미합니다. ‘깨달은 자’란 유일한 자가 아니라 다수일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원시불교 시대에는 부처란 곧 석가모니를 의미했고, 그 제자들에게 ‘부처’란 오직 석가모니 한 분뿐이었으며 그 고정관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대종경 교의품 15장 법문을 통해 기존의 등상불을 향한 불공을 산 부처, 즉 활불에 대한 실지불공으로 확 돌려놓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상식을 깨트린 과감한 변혁이었습니다.

세상이 정말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코로나19라는 새로운 변수의 등장으로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으며 인류는 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변화에 대처하기조차도 힘겨워하며 세상은 변화에 종속되고 끌려가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이 시대의 변화를 우리는 선천시대는 저물어 가고 후천시대가 열린다고 표현하고 이것을 단적으로 ‘개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제의 방식으로는 오늘을 살아갈 수 없는 변화의 시대, 즉 개벽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저는 오늘 ‘불공’이라는 키워드로 풀어 보고자 합니다. ‘불공’의 사전적 의미는 ‘불보살에게 공양하는 종교의례’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불보살에게’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즉, 공양을 올리는 불공의 대상이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우리는 선천과 후천이 바뀌는 개벽시대의 불공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공의 대상이 불보살이라면 불보살은 과연 누구인가? 역사적으로 변혁의 시대가 다가오면 영웅이 등장하고 새로운 사회 규범으로 역사를 변화시켜 왔습니다. 강물의 마지막과 바다의 시작이 만나는 곳에는 혼돈과 함께 역동적인 에너지가 함께 하듯이 선천의 끝자락과 후천의 첫 울림이 만나는 개벽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혼돈 속으로 자멸하느냐, 역동적인 에너지로 개벽시대를 주도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는 달라질 것입니다. 

요즈음 ‘라떼’라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직장 상사의 대명사로 꼽히는 부장님의 ‘나 때는 말이야’하며 후배를 가르치려 드는 꼰대를 빗대는 표현으로 말입니다. 위아래를 따지고, 위계질서를 중시해 온 기존의 사회 질서는 무너지고 있고 이것은 과거의 불공의 개념에서 벗어나 소태산 대종사께서 제시하신 활불의 등장과 활불 상호간의 불공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산중에 홀로 있던 등상불을 향해 불공을 올리던 시대에서 도심의 한 가운데를 누비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부처되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과연 나는 부처인가?’에 대한 확신을 우리 자신 스스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처처에 불상이 되지 못하면 사사의 불공이 이루어질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불공’이라 하면 산중 절간의 등상불에 정성을 바쳐 기원 올리시던 어머니를 상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없애기 위해 저는 오늘 개벽시대의 불공을 위한 키워드로서 ‘존중’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 사건·사고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존중’의 결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중’을 위한 전제조건은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실행하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역지사지의 과정을 거친다면 ‘존중’은 자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개벽시대의 불공이란 한 부처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인연 맺는 수많은 활불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군산교당

[2020년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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