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우(볼프람 바우흐)
독일 레겐스부르크교당

독일 레겐스부르크교당 원정우
독일 레겐스부르크교당 원정우

한독 기술협력의 일환으로 1970년경부터 대한민국 항구도시 부산에서 대규모 환경보호사업이 진행되었다. 팀의 핵심은 한국인 엔지니어 5명과 독일 엔지니어 5명, 한국인 1명과 독일 경제학자 1명으로 구성됐다. 기술 제도자 및 기타 보조자들까지 거의 40명의 직원이 있는 사무실이 만들어졌다. 사무실은 부산시 토목국 소속이었다. 당시 나는 이 독일-한국 팀의 리더였다. 가족(어린 자녀 3명)과 함께 부산에서 5년 동안 일했다. 그 결과 온 가족이 한국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1976년 늦가을에 독일로 돌아왔다. 나는 1980년에 내가 꿈꾸던 교수라는 직업을 얻을 때까지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일했다. 이후 바이에른에 있는 레겐스부르크 공과 대학의 수력 공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나의 아내는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가 레겐스부르크에 정착했을 때, 그녀는 즉시 좋은 합창단과 연결될 곳을 찾았다. 합창 리허설에서 한 젊은 한국 여성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내 아내는 그 아가씨를 ‘한국인’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한국 문화를 아는 사람들을 알게 되어 기쁘다고 했고, 우리는 한국인을 알게 되어 기뻤다. 우리는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최대한 오랫동안 신선하게 유지하고 싶었다.

기술 대학에서 일하면서 나는 매우 민첩하고 젊은 청년을 알게 되었고, 그 학생은 곧 우리 친구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젊은 한국 여성과 유능한 독일 청년은 우리 집에 자주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에는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마침내 우리의 넓은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곧 레겐스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우아한 한복을, 그는 그의 직업에 어울리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젊은 부부가 처음으로 한국에 갔을 때 아내와 나도 기회를 잡고 다시 한국으로 날아갔다.

한국에 처음 간 독일 새신랑은 장모를 만나고 한국을 아주 좋아했다. 이후 우리가 처음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청년 페터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큰 차를 몰고 다니며 사교를 하던 유능하고 민첩한 사업가가 점차 불교도가 되었고, 마침내 원불교 교무가 되었다. 오늘날의 원법우 교무님이다.

우리는 그와 그의 아내와 좋은 친구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원불교와의 첫 만남이 되었다. 나와 내 아내가 처음부터 원불교에 대해 특히 좋아했던 것은 원불교 교도들이 다른 많은 그룹처럼 명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봉사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익산에 있는 원불교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의과대학과 병원 등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기에는 제산 손흥도 박사님의 레겐스부르크 초청도 포함되었다. 그는 나를 포함해 이곳에서 침술로 많은 아픈 사람들을 도왔다. 그는 적어도 일시적으로 나의 천식을 완화 시켜주었다.

첫 익산 여행도 손 박사님의 침 치료 여행이었다. 4년 후 우리는 다시 침술을 받기 위해 익산을 찾아갔다. 두 번 모두 우리는 남녀 교무님들의 친절에 행복했다. 기독교 서구 사회에서의 삶이 일반화되어 있는 우리에게 처음에는 큰 캠퍼스(익산성지)에서 남녀 교무님들이 수도원에 산다는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매우 긍정적인 경험이 되었다.

엔지니어 페터의 원불교 법우 교무님으로의 변신, 손 박사님의 유능한 성품, 적극적인 자선, 수도원 교무님의 친절함, 수도원 캠퍼스의 남녀공생, 이 모든 것이 마침내 이끌었다. 내가 원불교 교도가 되도록 말이다.

내가 그린 다음 스케치는 익산 수도원에서 받은 인상 중 하나를 반영하고 있다. 성탑 위에는 황금 원(일원상)이 있고, 그 위로 소나무 가지가 돌출되어 있다. 기독교의 맥락에서 ‘위에서’는 항상 ‘하늘에서, 좋은 것, 축복이 위로부터 온다’를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어떻습니까? 열반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여기 아니겠는지요.

나와 내 아내가 
처음부터 원불교에 대해 
특히 좋아했던 것은 
원불교 교도들이 
적극적인 봉사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독일 레겐스부르크교당.
 독일 레겐스부르크교당.

나와 원불교, 중국의 기막힌 인연
 

나는 올해로 입교한 지 10년 차다. 시작이 언제였을까? 아마 대학교 1학년 풋내기 시절이었겠다. 원불교에 대해서는 역사책에서 ‘민족종교’라는 말을 접해 본 것을 제외하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 무슨 인연이었는지 원광대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2학기에 ‘종교와 원불교’ 과목을 수강했다. 시험을 준비한다고 열심히 교리도를 그리며 외운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교리도는 거북이와 무척 닮아서 기억하기도, 외우기도 편했다. 그렇게 나는 남들과 달리 교리에 흥미가 먼저 생겨 교무님의 손을 잡고 입교했다. 그것이 나와 원불교의 첫 인연이다.

입교했을 때는 공교롭게 한중수교 20주년이었다. 평소 학과 지도교수님의 영향으로 중국사에 흥미가 있었던 나는 그해에 중국을 갈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중국 현지에서 여러 역사 문화체험을 통해 중국에 대한 이해와 견문을 넓혀 나갔다. 이를 기회로 나는 단순 흥미를 넘어 중국사를 전공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때까지는 나와 원불교 그리고 중국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었다.
제대 후 복학해 대학교당과 북일교당을 다니며 학과 공부에 지칠 때마다 교무님을 찾아 고민을 나누고, 바쁜 와중에도 학생 교도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 같이 교당에 다녔던 모태신앙인 한 형은 내게 “너는 교당을 왜 이리 열심히 다니냐. 혹시 밥 먹으러 다니는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그것도 없지 않아 있지”라며 우스갯소리로 넘긴 적도 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당겨 졸업하고 나는 중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중국어도 유창하지 않은 상태 도착한 현지는 생각보다 어려움이 곳곳에 있었다. 그때 대학교당 교무님께서 알려주신 중국교구장님 연락처로 연락을 취해 통사정을 했다. 교구장님은 흔쾌히 베이징교당에서의 하숙을 허락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한 달여간 집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렇게 중국유학 생활의 첫 시작도 원불교와 함께 한 발을 내디뎠다. 그때 불현듯 나와 원불교 그리고 중국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그때, 베이징교당 교무님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 덕분에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별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해서도 여유가 있을 때마다 교당을 찾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일 가운데 한 가지를 고른다면 당시 경산종법사님과 원광대 학산 박윤철 총장님이 베이징교당에 방문하셨던 일이다. 사실 배고픈 유학생에게는 누가 오시는 것은 둘째고, 교도님들께서 정성스레 해주신 맛있는 음식이 더 눈에 들어왔지만…. 그 와중에 교도님들의 신심에 한번 놀라고, 교당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모두가 합심하는 모습에 나는 두 번 놀라며 경외심을 갖게 됐다. 또 하나, 어른 모시는 법을 배웠다.

나는 석사를 마치고 박사 1학년 2학기에 접어들었다. 올해는 한중수교 30주년이고, 나와 원불교의 인연은 10년이 되는 해라 내게 꽤 의미가 있는 년도다. 코로나 19로 인해 현재는 교문 밖으로도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중국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나는 감사생활을 하는 중이다. 이렇게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내 모습. 이것은 아마 원불교와 중국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 아닐까 한다.

- 조대호·베이징교당

일본 오사카교당
일본 오사카교당

[2022년 4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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