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44년 이리교당에서 안혜삼화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안타원 안정진(安陀圓 安正眞)원로교무. 젊은 시절부터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무상'이 마음에 자리했다. '수도를 하면서 일생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수도생활을 동경하였음은 숙겁에 도문과 깊은 인연이...
초발신심이 난 양원경 교도를 당시 대산종법사께 인사시켰다. 구릿골에서 종법사님은 반갑게 맞아주시며 "잘왔다"하고 칭찬도 하시고 사진도 찍어주셨다. 그리고 "원경이 네가 청운회를 한 번 조직해서 전국의 모범이 되게 운영해 보아라"고 말...
동산선원에서 공부하던 시절은 내게 마냥 즐거웠었다.나는 전무출신 지망자가 나타날 때처럼 기쁜 일이 없었다. 많이 행복했다. 그래서 후진 양성에도 늘 정성을 다했다. 총부 근무 당시 알게 된 후진을 야간 중등과정을 밟도록 주선하여 졸업시켰다. 후진들이 교화현장에서 큰 일...
원기31년 원평교당에서 어머니 최형진옥의 연원으로 입교한 효타원 김법진(孝陀圓 金法眞) 원로교무.원기29년부터 어머니의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원평교당을 오갔다. 원평교당이 금산리로 이사한 후에는 통사동 집에서 5km였다. 멀었지만 학교가 끝나면 거의 교당에 다녀오는 것이...
운봉교당은 이웃교당과 단합해 공부발표를 하는 등 공부하는 교당 분위기를 이끌었다. 또한 신정예법으로 교도들의 애경사를 챙겼다. 교도들도 감동해 교화는 나날이 번창했다. 교당의 경제적인 토대를 마련하고자 전임이 조직한 계를 유지하여 교당유지 답을 매입하고 후임에게 교당신...
'명산대천 가까운 데는좋은 인재가 많이 나니전무출신을 많이 시켜라'원기36년은 시국이 혼란스러워 '1대 성업봉찬'을 원기38년으로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원기38년 3월에 나는 총부 간사근무를 마쳤다.간사근무를 하는 동안 아침이면 정산종사의 숙소에서 독경하는 ...
원기32년 영광 도양교당에서 이제운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이성로(91·溫陀圓 李性路) 원로교무. 영광 군남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원기32년 2월 한줄기 향학일념으로 도양교당에서 2년 동안 간사생활 했다. 도양교당은 사시사철 울창한 죽림에 둘러싸인 교화현장이었다. 당시 은타원 조일관 교무를 받들며 초발심으로 살았다. 원기34
▲ 송명호 원로교무 태어나던 해 원기24년 익산교당에서 이대교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면타원 송명호(免陀圓 宋明鎬) 원로교무. 유년시절부터 평범한 삶이 아닌 좀 더 거룩한 삶을 살고자 염원했다. 전무출신을 목적하고 성장하는 듯 순한 성품으로 남에게 주기를 좋아했다. 청소년 시절에는 학생법회에 개근할 정도로 법회를 소중히 했고, 교우들에게도 늘 희생적이고 정
원기34년 4월1일 좌포교당에서 홍경안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흥타원 최만진(興陀圓 崔滿振) 원로교무. 고모할머니의 인연으로 원불교를 알게 된 그는 20세에 홀로 출가를 하겠다고 판단한 후 진안 좌포에서 걸어서 관촌까지 와 열차를 타고 익산으로 왔다. 당시 그는 익산 갈 차비만 챙겨들고 나왔다. 혹시라도 수중에 돈이 있으면 다시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1년을 요양한 후 새롭게 창설한 서면원광한의원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공익부장은 "경상도에 오래 산 남열 교무가 갔으면 좋겠다"고 몇 번을 권했다. 조용한 농촌교당에 근무하고 싶다는 나의 작은 소망도 놓아야 했다. 첫 개업이라 한의원에는 손님이 없었다. 한의사와 일요일마다 교당에 가서 법회도 보고 침 치료를 했다. 이후 이리보육원으로 근무
병마를 극복한 나와 부교무는 다시 열심히 교화에 임했다. 법타원 김이현 교화부장과 손정윤 교무가 교당에서 교리강습을 할 때면 시간을 맡아 줬다. 법타원님은 "강습회에 교도들이 많이 오고 안 오고는 첫날은 교무 책임, 둘째 날은 강사책임이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순교했다. 구두 굽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90명이 넘는 사람이 와서 강
▲ 임남열 원로교무 결핵 치료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병원을 찾아다녔다. 어느 정도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치료가 되자 교화훈련부에서 입교 업무를 맡았다. 이후 반백년기념사업회에서 출납을 맡았으나 근무하는 동안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던 일도 많았다. 결국 동지 교무와 상의한 결과 교당 교화로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수원교당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수원교당은
태풍 피해는 한 달 이상 매일같이 치워도 끝이 없었다. 수해소식이 전해지자 진영, 대구, 부산, 마산 교무들과 교도들이 원조를 해 많은 도움이 됐다. 수해정리가 끝나자 교도회장은 "이제는 공부를 해야 한다"며 총부 중앙선원으로 보냈다. 졸업 후 전주교당 부교무로 부임했다. 둥근형 법당에 교도는 300명이 넘었다. 법회 전에는 시장 속 같이
친구들은 매년 동창회를 하며 인생문제를 논하며 밤새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했다. 나는 평생 공부만 하고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도를 깨치면서 살고 싶었다. 친구들은 나를 가엽게 여겨 만날 때마다 설득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부터 인생무상에 빠졌던 것이다. '이차돈' 연극을 보며 진영교당으로 구경 다니다가 학생회와 일반법회에 나가게 됐다. 어느 일반
이듬해 원기71년 2월14일 전북교구 덕진교당 교감교무 겸 덕진원광어린이집 원장으로 발령이 났다.10년 된 덕진교당은 아직 초창기나 마찬가지였다. 1층은 어린이집, 2층은 소법당이었다. 전임의 노력에도 교당 부채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빚을 갚아가며 교도 법호수여식은 뒷마당에서 검은 망을 치고 성대히 했다. 차츰 3층에 법당을 증축하고 어린이집이 활성화돼
급히 모인 여수교당 요인들에게 나는 "제가 가만히 생각하니 여러 요인님이 아무 말씀도 없으니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결국 여러분들이 희사로 정해서 하고 권선도 해 오셔야 되는데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없었던 걸로 하자고 모이라고 했습니다"는 속내를 밝혔다. 이에 박일경 주무는 "교당 불사가 뉘 집 아기 이름도 아니고 거대한
창평교당 첫 법회 후 만타원 권일경 창립주로부터 교당 설립의 내역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의 과정이 있어 감나무 집을 무료로 빌려 줘 교당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창립주 교도의 말을 듣고 '저축을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의식금이 들어오...
원기33년 2월9일 승부교당에서 입교한 관타원 유향원(觀陀圓 柳香元) 원로교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화해교당에 가서 당시 김해운 할머니에게 대종사와 정산종사가 만났던 이야기에서부터 신기한 이야기 등을 들으며 자랐다.유 원로교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 교당에만 다니며 살고 있었다. 원기34년 어느 날 정산종사가 승부교당에
교역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결과 원기88년 화천보은의 집을 개원할 수 있었다. 이어 원기89년에는 춘천효도의 집도 개원했다. 강원도 땅에서 두 복지기관의 개원 과정은 눈물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두 기관 설립에...
원기42년 1월1일 대마교당에서 입교한 무타원 이법륜(茂陀圓 李法輪) 원로교무. 나는 기독교 목사가 되기를 서원하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빈부귀천의 차별세계'에 대한 의문이 많아 담당 목사와 수없이 의견 교환을 했다. 하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원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