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기100년 2월에 모스크바교당에 첫 근무지로 부임하게 됐다.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하루 일과는 변함이 없다. '일과로 득력하자'는 법문을 받들어 '찰나찰나가 쌓여 하루가 되고 하루하루가 쌓여 영생이 된다'는 심경으로, 아침은 수양정진 시간으로 6시 아침심고와 법신불 일원상에 대한 4배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일상수행의 요법을 마음에 새기면서 암송하고, 〈좌선의 방법 해설〉을 먼저 봉독한 후 좌선을 시작한다. 한 시간 동안의 좌선과 의두연마를 한 후에 좌선을 어떻게 했는지 돌아가면서 각자 발표한다. 이를
교화자의 삶
조정우 교무
2017.11.17 13:47
-
원기98년 8월29일 영산선학대학교에 입선해 1년간 4선기로 나누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도 쉬지 않고 공부했다. 일과는 영산대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아침 좌선부터 저녁심고, 염불, 일기쓰기 등 모든 일과와 〈원불교교사〉, 〈불조요경〉, 〈예전〉, 〈성가〉 등 교법 교리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다만, 〈정전〉과 〈대종경〉, 〈정산종사법어〉는 기간제 전무출신 3명이 함께 미리 공부할 주제를 정해 연마하고 각자 돌아가면서 발표 후 회화를 하고 담당교무님이 부연설명 해주는 방식으로 진행해 심도 있고 알찬 공부가 됐다.겨울 보은봉
교화자의 삶
조정우 교무
2017.11.10 13:55
-
고향인 전남 구례의 고등학교 재학 중, 당시 1학년 같은 반이었던 정인성 교무(현재 문화사회부장)의 연원으로 원불교를 처음 알게 되어 학생시절에는 구례교당을 줄곧 다녔다. 당시 교당에서는 교도회장님이 한자도 가르쳐주시고, 교무님이 교리 공부도 열심히 지도해 주셔서 많은 학생들이 교당에 다니는 것을 참 즐거워했고 좋아했다. 당시 스승님(만타원 정도중 교무님)께서는 정법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을 주셔서 많은 학생들이 전무출신 서원을 세우고 다지는 계기가 됐다.나는 일찍이 공직에 뜻을 두어, 1977년부터 고용노동부에서 35년간 공직생활을
교화자의 삶
조정우 교무
2017.11.03 13:50
-
여전히 내 몸에 배어 있는 것은 친절과 봉사다. 한의원이나 병원은 의사만 잘한다고 해서 모두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가 50이면 직원이나 간호사도 50을 채워야 한다. 의사만 잘하고 직원이나 간호사가 못하면 손님들은 "간호사 때문에 안 갈란다. 다른 병원 갈란다"하고 안 오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똑같이 잘해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 친절하게 봉사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병원과 직장 이미지는 올라가게 돼 있다. 나는 내 신념으로 지금까지 실천하고 다닌다.내가 살아오면서 좋지 않은 인연을 맺은 기억은 없다. 그러나 한
교화자의 삶
임형원 덕무
2017.10.20 15:45
-
내 이름은 찾아주시는 어르신들에 의해 '보화당'이 됐다. 길을 가다가도 나를 만나면 "어이~ 보화당 어디가?" 하며 반갑게 인사하는 어르신들. 더욱 놀라운 건 역전보화당을 떠나 함열교당 은혜마을과 진안 원광허브에 근무하면서 3년이란 세월을 떠나 있었는데도 "보화당~ 어디 갔다 왔어?" 하며 나를 기억해 주신거였다.내가 '보화당'으로 불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역전보화당에서 근무할 때 나는 '모든 일에 맡은 바 진실과 정성을 다하고, 동료와 손님들에게 좋은 인연이 되자'는 신념으로
교화자의 삶
임형원 덕무
2017.10.13 15:33
-
고된 날은 매일 계속됐다. 한약재가 당시에는 마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말리기 위해서 옥상으로 들고 올라가야 했다. 숨이 컥컥 막혔다. 피곤함에 못이겨 저녁에 작두에 한약재를 썰면서 졸기도 했다. 여지없이 손가락을 베어 상처투성이가 됐다.일년을 넘게 하다보니 슬슬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 기술이나 배울랍니다"고 말씀드리면, 어른들과 동료들은 "보화당보다 더 좋은 직장은 없다. 나가봐야 여기보다 좋은 곳이 없다"며 한사코 말렸다. 그럴 때마다 다시 마음을 돌리고 돌리곤 했다.원기72년에는 건재부
교화자의 삶
임형원 덕무
2017.09.08 09:38
-
나는 원기62년에 당시 이리·역전보화당의 대표였던 윤산 김윤중 종사의 인연으로 역전보화당에 취업하게 됐다.고향은 영광군 염산이었는데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였다. 그때는 원불교라는 종교도 몰랐고, 더구나 역전보화당이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취업 면접이라 무척 긴장을 했다. 월요일날 인사드리는 날이었는데 당시 교통도 요즘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일요일날 익산에 올라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기62년 2월8일 면접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아마도 같은 동향이셨던 김윤중 종사의 인연이라서 그런지 많이
교화자의 삶
임형원 덕무
2017.09.01 14:31
-
원불교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과 에스페란토에서 여러 언어로의 번역을 진행하는 것 외에 에스페란토 국제선방과 세계에스페란토대회 원불교 분과모임에서 원무로서 역할을 해왔다. 에스페란토 국제선방은 2006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으며 보통 국내외 참가자가 30-70명이다. 서울에서 열리는 102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를 계기로 올 여름 13차 국제선방에는 세계 20여 개국에서 120여 명이 참가했다. 국제선방에 필요한 50-60쪽 책자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편집해오고 있으며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참가해 원불교 교리 등을 알렸다.세계에스페란토
교화자의 삶
최보광 원무
2017.08.18 14:36
-
1985년 종로교당에서 시작한 원불교 교전 에스페란토 번역과 윤문 작업은 세계 여러 나라를 거쳐서 총부 정역원 사무실에서 1998년 6월 드디어 마쳤다. 당시 번역에 많은 지도를 해주신 좌산종법사님은 에스페란토 교서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할 것을 명하셨다.첫 결실은 스페인어였다. 7개 언어에 능통하고 이슬람 신학과 아랍어를 가르치는 스페인 사람 리카르도 알베르트 레이나 교수를 소개받았다. 1999년 7월 총부에서 윤문 작업을 마친 〈정전〉은 8월 한국어-스페인어 원불교 〈정전〉 자문판으로 발간되었다. 〈대종경〉은 200
교화자의 삶
최보광 원무
2017.08.11 14:54
-
〈원불교교전〉 번역을 완성한 후 정산종사 탄생백주년을 맞아 〈정산종사법어〉를 2000년 1월부터 시작해 4월에 에스페란토 초벌 번역을 마쳤다. 2000년 7월 완도 조실에서 번역상 어려운 사항에 대해 좌산 종법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해 자문판이 발간되었지만 다시 여러 해 작업을 걸쳐 마침내 2011년 12월 윤문 작업을 완성했다. 특히 윤문할 때 정역을 담당하고 있던 류정도 교무와 전자편지로 방대하게 의견을 나눴다.성가는 2004년 9월 번역을 시작해 이듬해 4월 초벌 번역을 마쳤지만 200곡 모두를 컴퓨터 악보에 가사를 넣어야
교화자의 삶
최보광 원무
2017.07.21 15:22
-
당시 종로교당 이광정 교감님의 격려 속에 1985년 5월 청년회 내 에스페란토 소모임 '일원회' 정기총회에서 홍성조, 육철 중심으로 〈정전〉 번역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로 했다. 나는 8월 행정고시 2차 시험을 치룬 후 사요부터 번역함으로써 참여했다."우리말로 편찬된 경전을 세계 사람들이 서로 번역하고 배우는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니"라는 전망품 3장을 실현시키는 일꾼이 돼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번역에 몰입했다. 이는 정말 아쉬운 시험 결과가 방황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86년 2월 법위등급까지 번역을 마쳤다
교화자의 삶
최보광 원무
2017.07.14 16:03
-
원기85년(2000년) 4월12일 처음 원무 사령장을 받았다. 현재 유럽 리투아니아에서 살면서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통한 해외교화와 정역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앞에는 넓은 들과 푸른 동해, 뒤에는 높은 산, 옆에는 맑은 강이 그림처럼 어울려진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5년 대구로 전학한 후 대한불교 진각종 종립학교인 중학교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심학' 수업에 교리를 배우고 선을 하는 데 참 재미있고 즐거웠다.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스스로 신앙처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종종 주말에 진각종
교화자의 삶
최보광 원무
2017.07.07 09:39
-
일원상의 수행은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 곧 일원상의 수행이니라'고 했다.나는 그동안 법문을 문자로만 익히고 배워서 말을 하고 귀로 들어서 전했다. 마음도 제대로 해결해서 알지도 못한 채 마음공부를 한다고 공부인의 흉내를 내며 살았다. 법문에서 밝혀준
교화자의 삶
고재일 도무
2017.06.23 15:25
-
소태산 대종사는 부촉품 15장에서 "우리의 사업 목표는 교화·교육·자선의 세 가지니 앞으로 이를 늘 병진하여야 우리의 사업에 결함이 없으리라"고 했다. 재)원불교 정관 제3조(목적)에서도 "법인은 대한민국 법률의 정한 바에 의하여 교화 및 교육·자선(의료 포함)등 공익사업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사회복지법인 삼동회의 삼동은 정산종사가 주창한 삼동윤리에서 비롯됐다. 재)원불교는 원기30년(1945) 8·15해방 이후 전재동포구호사업(이리, 부산, 서울 등지)을 비롯하여 원기37년(1952) 3월15일 신용양로원
교화자의 삶
고재일 도무
2017.06.16 10:47
-
"결혼은 원불교 교도랑 해라, 재일아" 하신 스승님(선산 박인도 교무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지내던 중 이수묘 정토와 결혼을 했다. 정토는 일찍이 부모님의 인연으로 입교를 하고 정읍교당 청년교도로 활동하고 있었다. 결혼 후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가족 모두가 자연스럽게 일원가족이 되었다.아들 종석은 대구 서성로 교당에서 목타원 최규원 교무님의 지도아래 간사 생활을 2년간 잘 마치고 현재 영산선학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다. 큰딸 은도는 중학교 때까지는 교당에 나가다가 고등학교 입시준비를 핑계 삼아 교당 가는 것을 미루더니
교화자의 삶
고재일 도무
2017.06.02 15:28
-
법당의 향 내음과 눈앞에 펼쳐진 일원상과의 첫 만남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원불교와 인연이 먼저 닿은 동생들로 인해 고등학교 2학년 때 원불교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 산외교당(당시 선교소)을 방문했다. 칠보교당(정제원 교무님) 연원으로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환경이 열악한 교당이었지만 넉넉하고 포근한 공간으로 다가왔다.몇 차례 교당을 오가던 중 탁혜진 교무님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입교를 하고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교당에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풍금 반주에 맞춰 성가를 배우고 가곡을 따라 부르며 추억을 만들어 갔다. 교리에는
교화자의 삶
고재일 도무
2017.05.19 15:37
-
"서약이 중하고 큰지라 만일 중도에 어기고 보면 중한 죄벌을 면치 못 할 것이며 마음 가운데 사심이 뿌리박거든 일원상을 묵상하여 본성을 돌이키고 대종사 성안을 묵상하여 심법을 체 받으며 나는 불제자요 공도자라는 자부심을 일으켜 그 사심을 제거하기에 힘쓰라"(〈정산종사법어〉 권도편19)시비이해 속에서 사는 게 인간들이고 인생인데 어찌 자유로울 수 있으랴! 살면서 어찌 경계가 없을 것인가? 서원이 약해지고 힘이 들 때면 써 놓은 이 법문을 새긴다.이곳 둥지골청소년훈련원은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훈련원이다. 구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수도권의
교화자의 삶
성종인 교무
2017.05.12 11:09
-
힘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낙원으로 인도하는 일은 세상 어느 일보다 거룩하며 교무가 되는 길이야말로 21세기에 가장 보람있는 길이라고, 멋진 교무가 되겠노라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강동교당을 떠나왔다.대종사님과 선진님들의 혼이 살아 숨쉬는 영산에서의 삶은 하루 하루가 성스럽고 고귀한 서원의 시간이었다.하루 하루가 아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나는 참으로 행복한 놈이다. 대종사님 법 만나 이 회상에 귀의했다는 것이 최고의 행운이고 느즈막에 전무출신하겠다고 나섰을 때 흔쾌히 쫓아내준 아내가 있어 행복하다.(처가는 지독한 기독교 집안이었기 때
교화자의 삶
성종인 교무
2017.05.05 09:37
-
초기 구례교당 순교, 주무, 단장으로 교무님을 지성껏 보필하던 어머니가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세수 53세 원기62년(1977) 늦은 봄날 군인이었던 나는 부음을 접했다.'다음 생은 꼭 전무출신을 하겠노라' 서원하고 떠나신 어머니! 구례교당 최초의 정식 법마상전급에 올라 꽃다운 법보에 오른 나의 연원이자 도반인 어머니! 교당에서 초파일 연등 만들다 잠깐 집에 일이 있어 갔다가 쓰러져서 손가락에 물든 파랑, 빨강, 노랑의 색깔도 지우지 못하고 열반에 드신 어머니! 어린 동생들에겐 "우지마라 우지마라 엄마 못 떠난
교화자의 삶
성종인 교무
2017.04.21 13:54
-
원기99년 5월말 기간제 전무출신 서원자 1기이며 현재 모스크바 교당에 재직중인 조우진 교무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 차분하고 침착한 후배(구례교당 학생회)였지만 그날따라 약간은 상기된 목소리였다. "형님! 우리 옛날 학생회 재연합시다. 형님이 앞장 서 주시죠." 큰 망설임 없이 1기에 신청 못한 기간제 전무출신의 한을 너무나도 쉽게 결정해 버렸다. 내 인생의 마지막 선택은 그렇게 정해졌다.어머니 손에 이끌려 몇 번 교당이라는 곳을 따라 가 본적은 있었다. 선생님(교무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이 4축2재 식장 꾸밀 때 도움을 요청하면
교화자의 삶
성종인 교무
2017.04.14 09:36